Page 6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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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 분과 1
구나 비판 의식 없이 인용된 임나가라, 임나가랑의 위치를 재비정하여 일본서기 임나는 한국의
가야와는 철저히 다른 고대 정치체제였음을 밝혔다. 가야지역에서 사민정책에 의해 중원으로 이
동한 인물이 강수였다는 기존의 강수에 대한 연구결과에 대해 강수의 성(姓)씨가 석씨임을 논증하
여 석탈해와 관련된 문헌을 토대로 강수열전의 임나가랑은 가야와는 일체 관련성이 없는 것임을
고증하였다. 이와 연계성이 있는 진경대사탑비의 임나왕족과 김유신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혈연
적인 관계가 없음을 논하여 진경대상의 선조인 임나왕족과 가야와는 아무 연관성이 없음을 고증
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 에도와 명치시기, 조선총독부를 거쳐 현 한일 가야와 임나관련 학자들의
가장 기초적인 논지인 임나의 한반도 존재, 그것이 가야이며 이는 일본서기 임나와 동일 정치체제
였다는 논지의 철회와 가야사의 올바른 정립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Ⅰ. 서 론
한국사의 가야를 일본서기 임나로 비정하는 1차 근거가 광개토태왕비문의 ‘임나가라 종발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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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삼국사기 강수열전(强首列傳)에서 언급된 ‘임나가랑인’ 그리고 진경대사탑비의 진경대사가
신김씨(新金氏)로서 그 선조가 ‘임나의 왕족’ 이었다는 기록이다. 조선총독부는 이 세 가지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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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중심으로 임나가 한반도에 존재하였다는 근거 자료로 삼아 임나는 곧 가야라고 비정해 왔다.
가야와 임나를 동일국가의 틀로 보는 시각은 일본의 명치시기부터 본격화 되었다. 일본은 에도시
대 때부터 국학의 붐이 불기 시작하였으며, 명치시기 때 대륙진출의 역사논리를 합리화시키기 위
한 명분을 일본서기에서 찾기 시작하면서 대외 주변국의 고대역사연구로 연결되었으며 한반도 진
출의 근거를 찾는 연구에 있어 그 첫 중심 연구대상이 광개토태왕비문이었다. 즉 신묘년에 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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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건너 한반도 남부를 공략 한 역사로 인식하도록 광개토태왕비문을 왜곡하여 인용하기 시
작하였으며 이어서 강수열전과 진경대사탑비의 내용을 추가하면서 임나가 한반도에 존재하였으
며, 곧 ‘가야가 일본서기에 기록된 임나’라는 논리근거를 명확히 하였다. 그리고 1920년 조선총독
부가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에게 한국사를 본격 교육하면서 국정교과서격인 ‘심상소학국사보충교
재 아동용’을 발간하여 고대 한일관계를 설정하며 가라국이 숭신천황 때 사신을 보냈다고 주장하
였으며 ‘심상소학일본역사 보충교재 교수참고서’에서는 현재 한국가야사학계에서 가야를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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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廣開土大王陵碑 』任那加羅 從拔城
2) 『三國史記 卷第四十六 列傳 第六 强首』王驚喜, 恨相見之晩. 問其姓名, 對曰, “臣夲任那加良人, 名字頭.” 王曰, 見卿頭
骨, 可稱強首先生.
3) 『眞鏡大師塔碑銘』大師諱審希俗姓新金氏其先任那王族草拔聖枝每苦隣兵投於我國遠祖興武大王鼇山稟氣鰈水騰精握
文符而出自相庭携武略而高扶王室...
4) 『廣開土大王陵碑』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 渡海(每)破。百殘口口新羅,以為臣民。以六年丙申
5) 『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 上古 の 朝鮮半島 3쪽. 天照大神の御弟素戔嗚尊は, 其の御子と共に朝鮮に渡り給ひしこと
あり。崇神天皇 【第十代】 の時, 加羅國はじめて使な日本の朝廷につかは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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