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9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P. 49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와 남한 강단 가야사학계 김수지
공들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간 것과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어야 맞는 것이 된다. 야반도주를 해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도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배를 타고 몰래 공인집단들이 빠져나갔다는 것
은 공인집단이 ‘배’를 사적으로 소유했을 때만 가능했을 것인데, 고대사회에서 공인집단이 그 정
도의 자산을 사적으로 소유했다고 볼 수 없다. ‘배’를 소유하고 관리하는 집단은 왕과 왕족 지배층
에 한정되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숙련된 기술자 집단이 나
라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는 경우는 없다. 두 번 생각하지 않아도 알수 있는 상식이다. 따라서
금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의 ‘공인집단’ 만이 소규모로 일본 기내지역으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
은 어불성설이다. 48)
일본열도로의 한반도도래인 대규모 이주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 강단 가야사 고고학계
는 가야사 문헌학계가 정해준 가이드 라인을 따라 『일본서기』 계체기에 언급되는 ‘임나 4현(任那
四縣)’과 ‘기문(己汶)’ ‘대사(帶沙)’를 모두 한반도 남부에 위치비정해놓고 있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고고학계 박천수의 논문 「호남 동부지역을 둘러싼 大伽耶와 百濟– 任那四縣
과 己汶, 帶沙를 중심으로–」의 일부분이다.
호남 동부지역을 둘러싼 대가야와 백제의 충돌은 필연적인 것이었으며, 이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 『日本書紀』繼體기에 보이는 이른바 任那四縣과 己汶, 帶沙지역을 둘러싼 대가야와 백
제의 공방이다. 즉,『日本書紀』 繼體 6년(512년)에는 백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任那四縣을 청하
니 이를 할양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또한 繼體 7년 백제가 사신을 통해 청하자 己汶, 帶沙를
주었다. 이에 伴跛 즉 대가야가 반발하여 子呑과 帶沙에 성을 쌓아 滿奚에 연결하고, 또 爾列比,
麻須比에도 성을 쌓아 麻且奚와 推封에 연결하였다. 繼體 27년(529년) 聖王이 下口多唎國守
穗積押山臣에 일러 使者들이 항상 섬을 돌아올 때마다 풍파에 시달려 가지고 가는 것이 파손되
므로 加羅 즉 대가야의 多沙津을 청하게 하였다. 이를 백제에 주었더니, 加羅王이 대대로 내려
오는 港임을 강조하며 부당하다 하였으나 결국 백제의 것으로 하였다. 49)
이와 같이 박천수는 『일본서기』 계체기에 언급되는 ‘반파국’을 대가야라고 비정하고 ‘任那四縣
과 己汶, 帶沙’ 지역을 호남 동부로 비정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일본열도 한반도도래인’이 대규모
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기내 야마토왜가 4세기 이후로 일본열도를 통일했다는 전제를 근거로
『일본서기』 계체기에 나온 지명들을 전부 한반도 남부에 비정한 것이다. 앞에서 김석형과 조희승
의 분국론에 의하면 『일본서기』 계체기에서 백제와 야마토 왜 정권과 반파국이 ‘기문, 대사’로 공
방전을 벌인 지역은 ‘기비지역 현재 오카야마현’이다.
48) 김수지, 「일본열도 한반도도래인(韓半島渡來人)설 부정(否定)인식 정리」, 바른역사학술원, 역사와 융합 제10호,
(2022), 36~37쪽
49) 박천수, 「호남 동부지역을 둘러싼 大伽耶와 百濟– 任那四縣과 己汶, 帶沙를 중심으로–」, 韓國上古史學報 第65號,
2009. 108쪽
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