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7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P. 47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와 남한 강단 가야사학계 김수지
정체성을 보전하는 임무도 맡고 있는 것 같다. 이 일본 국가의 정체성은 김석형의 분국론이나 에
가미 나미오(江上波夫, 1906~2002)의 기마민족설과 상충할 수밖에 없다....고고학자는 일본국
가의 정체성 조성을 지향하는 문헌사학의 역사관을 추종한 결과 많은 제약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4)
위의 글에서 세키네 히데유키가 지적했듯이 ‘기내 야마토왜 중심사관’은 4세기 무렵에 시작된
것으로 보는 ‘일본의 고분시대’ 가 ‘기내 지역 야마토 왜 왕권’에서 시작되어 서일본 전역을 ‘중앙
집권적으로 통일’했다는 것이다. 또한, ‘4세기 고분시대 기내 야마토 왜왕권’을 ‘일본 국가의 정체
성’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헌사학인 ‘쓰다 사학’이고 그 문헌사학의 통제 와
추종 아래에 있는 것이 ‘일본 고고학계’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4세기 고분시대 기내 야마토 왜
왕권’은 그 강력한 ‘중앙집권 왕권’으로 ‘한반도 남부’까지 와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는 것이 바로 남한 강단 가야사 학계의 현실이다.
이와 같이 일본 고고학계가 ‘쓰다 문헌사학’의 영향 아래 있는 것처럼, 남한의 강단 가야사 고고
학계도 역시 ‘쓰다 문헌사학’이 만든 가이드라인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남한 강단 가야사 문
헌사학계는 『일본서기』의 진구황후 49년조 신라정벌 기사 내용의 주체를 ‘일본 야마토 왜’가 아니
라 ‘백제’로 대처한다는 식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기내 야마토 왜’가 4세기에 한반도 남부까지 와
서 단지 ‘백제’라는 ‘허수아비’를 내세워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을 완곡하게 에둘
러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서기』에 언급된 한반도 한국 고대 국가들과 ‘야마토 왜’의 관
계를 오로지 한반도 남부 공간에만 제한시켜놓고 해석하는 방식은 ‘인류 유전학자들의 연구 결과’
들을 완벽하게 무시하면서 ‘쓰다 사학’의 ‘일본민족 단일민족론’에 전적으로 복속되는 논리이기
때문에, ‘백제 대체론’에서 어떤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찾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것은 단지 쓰다가
만들어 놓은 ‘4세기 강력한 기내 야마토 왜 정권’이라는 기본값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다음은 가야 고고학계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박천수가 <2018년 가야고분군 세계유산등재를
위한 국제학술대회>에 제출한 발표문 「가야加耶와 왜倭의 교류交流의 변천과 역사적 배경」 중의
일부이다.
4세기 말 오사카부大阪府) 오바데라大庭寺유적에서는 초기 스에키가마가 오사카 남부에 조업
을 개시하는 것에서 왜왕권과 밀접한 관계하에 이주한 금관가야로부터의 이주 공인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이 고분군의 피장자는 단야구 등이 부장되고 인근에 고구마小隈유적 등의 아사
쿠라朝倉유적과 초기 스에키 가마가 위치하는 것에서 한반도 남부, 특히 소가야지역에서 이주
한 토기와 철기 제작 공인집단으로 추정된다. 5세기 전반 에히메현愛媛県 이치바미나미구미市
場南組유적에서는 소가야양식 토기가 제작된 것이 확인된다. 이는 후쿠오카현 아사쿠라朝倉가
44) 세키네 히데유키(關根 英行), 「일본인의 형성과 한반도 도래인」, 경인문화사,(2020), 347~350쪽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