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8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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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 분과 1
마와 같이 소가야계 공인이 이주하여 조업한 것이다. 이는 인접한 돈다바라土壇原고분군에서
후쿠오카현 이케노우에池の上고분과 고데라古寺고분군과 같이 5세기 일본열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매장주체부내에서 토기가 부장되기 때문이다. 즉 이치바미나미구미市場南組유적에서
제작된 초기 스에키가 부장되어 토기가 부장되는 것은 망자에게 음식물을 공헌하는 한반도 남
부의 묘제를 따른 것으로, 이 고분군의 피장자는 소가야계 토기 공인 집단일 가능성이 크다. 45)
위의 글에서 박천수는 “4세기말,..왜 왕권과 밀접한 관계하에 이주한 금관가야로 부터의 이주
공인이 존재함을 알수 있다...아라가야로부터 공인이 이주한 것을 알수 있다..한반도 남부, 특히
소가야지역에서 이주한 토기와 철기 제작 공인집단으로 추정된다. ...이 고분군의 피장자는 소가
야계 토기 공인 집단일 가능성이 크다” 라고 썼다. 이러한 서술은 고분시대 4세기 무렵에 한반도에
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이주민들이 대규모가 아니라 인구 유전자 형질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정도
의 소규모 라는 관점에 근거한 전형적인 서술이다. 46) 한반도 도래인들이 일본인 인구형성과 구조
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기본 전제에서 박천수가 주장하는 것은 ‘교류, 교섭’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세키네 히데유키는 이렇게 ‘상호교류’만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 “도래인은 어디까지나
상호교류의 매개자로서만 파악되고 있을 뿐 인류학자가 제기한 긴키 지방 대규모 도래에 대해 해
답을 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 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47) 박천수는 대규모의 한반도도래인
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상호교류’⬝‘공인집단만 이주’라는 좁은 범위로 한정해서 일본열도에
서 출토되는 ‘가야 유물’들을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어떻게 고대 사회에서 ‘공인집단’만 이주가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박천수는 아무 설명도
하지 못하고 있다. 고대사회가 신분 계급에 의해 작동되는 사회라는 것은 굳이 별도의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식이다. 공인집단이 이주하려면 당시 금관가야나 아라가야 지배층 왕과 왕족들이
공인집단이 이주하도록 허락했거나, 허락하지 않았다면 야반도주를 했거나, 아니면 일본 기내 야
마토왜가 금관가야나 아라가야 지배층들하고 전쟁을 하고 뺏어와야 하는 것이다. 임진왜란때 도
45) 박천수, 「가야加耶와 왜倭의 교류交流의 변천과 역사적 배경」, 2018년 가야고분군 세계유산등재를 위한 국제학술
대회, (2018), 113쪽.
46) 일본의 인류유전학의 선구자인 도쿄대학의 오모토 게이치(尾本恵市, 1933 ∼ )는 일찍이 한국인과 일본인의 계통
관계에 주목해 왔다. 23개의 고전적 유전 마커를 사용해서 세계 25집단 간의 유전적 계통관계 밝혀 ‘본토 일본인(아이
누와 오키나와 집단을 제외한 일본인)’과 ‘한국인’이 제일 가까운 관게에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세키네 히데유키, 「일
본 고고학자의 한반도 도래인 인식- 일본 인류학자와의 대조를 통해서 -」, 『東아시아 古代學 第42輯(2016.06)』,(201
6), 252쪽. ; 또한, 국립유전학연구소의 사이토 나우야(斎藤成也, 1957∼ )는 유전적으로 아이누 집단과 오키나와 집단
이 가장 가깝고 본토 일본인 집단은 양자의 중간에 위치하는 동시에 한국인과 같은 클러스터에 속한다는 결과를 얻었
다.-이진아, [이진아의 지구위 인류사(가야사편)] 일본인 유전자 지도에 담긴 역사,시사저널, 2017.04.06. 기사. 이와
같은 인류유전학자들의 연구결과들은 일본열도로 건너간 한반도 주민들의 규모가 일본인 인구형성에 큰 영향을 준
대규모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47) 세키네 히데유키(關根 英行), 「일본 고고학자의 한반도 도래인 인식- 일본 인류학자와의 대조를 통해서 -」, 東아시
아 古代學 第42輯, (2016), 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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