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6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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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 분과 1
이러한 연민수의 주장은 대체로 현재 남한 대학강단 가야사학계를 대표하는 주장으로 볼 수 있다.
이 주장들의 핵심은 ‘언제⸱어디서’ 라는 ‘시간과 공간’을 지정하는 기본 전제에 있어서 일본제국주
의 시대에 만들어진 ‘쓰다 소키치’의 ‘일본민족 단일민족주의’ 사관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쓰다가 만든 역사적 실재의 시간인 ‘4세기’와 역사적 실재의 공간인 ‘기내지역’ 이라는 기본값에
대해 세키네 히데유키 43) 는 일본 고고학자들이 충실하게 쓰다가 만들어준 이 가이드라인에 따르
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인류학자가 밝힌 것처럼 현대의 긴키지방 주민과 한국인의 체질(유전자)이 거의 동일 수준으로
비슷해진 배경에 대해서는 고훈시대에 긴키지방으로 대규모 이주가 이루어졌다고 해석하는 것
이 가장 합리적인 설명일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자 대부분은 이러한 해석을 시종일관 외면해 왔
다. 필자는 고고학계가 고훈시대의 대규모 도래설을 부정하려는 이유를 일본국가의 정체성을
보존하려는 인식에서 찾고자 한다....최재석은 일본 고고학자 대부분이 야요이문화가 한반도에
서 규슈 북부를 거쳐 동쪽으로 전파된 것을 인정하면서도 고분에 관해서만큼은 이와 다른 해석
을 내놓고 있다고 했다. 즉, 기나이(畿內)에 돌연히 나타나 왜왕권에 의해서 지방으로 전파되었
다는 ‘방정식’(고분 기나이 발생->국내 통일->전국으로 고분 전파)이 고고학계에 군림하고 있
다는 것이다....이에 따르면 고고학자에게 있어 고훈시대의 기나이 및 그 주변인 긴키지방은 한
반도와 무관하게 발생한 매우 특별한 시대이자 공간이다... 그렇다면 고고학자의 고훈시대에 대
한 이러한 인식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일까? 고훈시대의 한일관계를 전공하고 있는 국립역사민
속박물관 준교수인 다카타 간타(高田貫太, 1975~)에 따르면, 일본 고고학에서는 전통적으로
고훈시대를 기나이에 근거지를 둔 왜왕권이 지역사회를 통합하여 중앙집권제를 형성해 가는 과
정으로 연구해 왔는데 이 현상은 문헌사학의 역사관을 추종한 결과라고 한다.....확실히 쓰다 소
키치(津田左右吉, 1873~1961)의 영향으로 전후 『일본서기』의 신대기(神代紀)와 초기 천황 기
사가 천황의 권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가공의 이야기라는 것이 고대 연구자의 상식이 되었다. 그
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10대 수진 천황(崇神天皇) 내지 15대 오진천황 이후의 기사, 즉 고훈시대
의 기사에 관해서는 여전히 사실로 인정했다. 즉, 신대(神代)와 초기 천황 시대의 권위는 사라졌
지만 고훈시대는 여전히 성스러운 시대로서 인식되어 있다는 것이다......고고학계가 문헌사학
계에서 이어받은 것이 바로 고훈시대를 ‘고분 기나이 발생->국내통일->전국에의 고분 전파’라
는 방정식에 따라 ‘기나이에 근거지를 둔 왜왕권이 지역사회를 통합하여 중앙집권제를 형성해
가는 과정’으로 파악하는 역사관이다. 이를 ‘야마토중심사관(大和中心史觀)’이라고 부르고자
하는데 이것이 고훈시대를 전공하는 고고학자의 금과옥조였다. 일본의 보수 세력은 천황가가
세운 왜왕권의 일본 통합이야말로 모든 일본인이 지녀야 할 일본국가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고 했다. 공론화하기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고고학자는 고대사를 복원하는 일 외에 일본국가의
43) 세키네 히데유키(關根 英行1962~) 가천대 동양어문학과 교수, 한국일본근대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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