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4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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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 분과 2
海)에 면한 ‘多良’에 비정된다. 다케오(武雄)가 ‘㖨國’에 비정된다면 거기서 동남방으로 가시마(鹿
島)를 거쳐 아래로 내려가면 太良[tara], 多良[tara], 田原[tahara]의 지명들이 연이어 나오고, 마
침내 多良中山과 多良山(岳)이 남쪽을 가로막고 서 있는 지역이 나오는데 다라(多羅)는 이 지역 일대
에 해당한다. 多羅(다라), 즉 多良(다량)은 더 정확히 말해서 지금 多良村으로 불리워지는데, 鹿島
(가시마)의 동남 4里(일본식 里數), 多良岳(다량악)의 東麓(동록) 해안에 있다. 多良岳은 그 동쪽 면
이 築紫海 쪽으로는 경사가 사뭇 완만한데비해서 서쪽 편은 오오무라(大村)灣으로 급경사진 까닭
에, 이곳 多羅(多良)까지 평정한 百濟·倭 연합의 西征軍은 여기서 진로가 막혀 부득이 회군함으로써
卓淳(多久)에서 東征軍과 재회동하였다고 해석된다. 8)
7) 가라(加羅)
「神功紀」의 이 加羅는 기타큐슈의 동송포(東松浦, 히가시마츠우라) 반도와 사도(糸島, 이토시마)
반도 사이의 당진만(唐津灣, 가라쓰만) 연안에 면한 「唐津(からつ)」에 비정된다. 「唐津」은 「加羅의
나루(津)」라는 의미도 있으나, 「나루」의 古語形인 「날/나라」는 알타이계 언어로 좁은 의미에서 「땅
(地)」을, 넓은 의미로는 「나라(國)」을 뜻하는 말이었다. 현해탄(玄海灘)에 면하고 이끼(壹岐)섬을 앞
에 둔 이토시마 반도는 이도郡과 시마郡이 합쳐서 생긴 고을이다. 반도의 북쪽이 시마군이고 남쪽
은 이도군이다. 그 북쪽의 시마군 일대는 예로부터 가야(可也)라고 불려지던 곳이다. 즉 이토시마
반도 最上端의 기따자끼촌(北崎村) 일대는 고대부터 「가라-도마리(韓泊)」라고 불리운 곳으로서 조
선에서 건너가는 직통길에 놓인 선박 정박지다. 또한 이 일대는 중세까지만 해도 《和名抄》 등에 시
마군 가야(가라)마을(加夜鄕·韓良鄕)이라고 밝혀져 있던 고장이었다. 특히 이곳 이토시마군 전원
정(前原町, 마에바루정) 일대는 가야산 등 가야, 가라와 관계되는 지명이 많이 있다. 또 좁은 지역에
밀집된 근 40기에 달하는 우두머리급 무덤인 전방 후원분이 존재하고 있고, 산허리를 이용해서
축성한 조선식 산성인 뇌산(雷山, 라이산) 산성이 있는 곳이라 초기 이토시마 반도가 가야(가라)
사람들에 의해서 개척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9)
8) 고해진(古奚津)
일본식 讀音으로 「コケツ(고게쓰)」라고 읽는 이 지명은 어원상으로 보면 한국어 고개(峴)와 비교
되는 지명으로 판단된다. 「koge(고개)>kuga>koga(ko-oka)」의 轉音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유추
된다. 다시 말해 이 과정에서 クガ(陸, kuga)->コガ(古賀, koga)로 轉音되는 중간단계로서, クガ(陸
/丘, kuga)와 뜻이 같은 コオカ(古丘/古岡, ko-oka)가 古賀(koga)로 변경 표기되었다고 보는 것인
데, 이는 kuga-koga의 類似音에 의한 모음변이 혹은 모음교체 현상이며, 음운학상 흔히 보는 용례
의 하나이다. [삭다>석다(>썩다)]. 신공기의 古奚津(koge-tsu)는 지금의 「肥前古賀」에 비정된다. 10)
8) 김인배·김문배(1995), 341~344쪽
9) 김인배·김문배(1995), 345~3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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