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7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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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이 조작하고 날조한 것이다 배종덕
위해서는 반드시 바다를 건너와야 한다. 비문에서 왜가 바다를 건넜다는 것은 대한해협을 건너 온
것이 아니고, 규슈에 있던 백제와 신라의 분국을 치기 위해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건너왔다는
것이다. 세토나이카이는 일본 열도의 본섬(本州)과 시코쿠(四國)섬 사이의 긴 내해(內海)로 호수같
이 조용한 바다다. 야마토 왜 조정에서 규슈로 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바다를 건너와야 한다. ‘왜
가 391년에 세토 내해를 건너와서 규슈에 있던 백잔과 신라를 격파해서 신민으로 삼았는데, 396
년에 광개토태왕이 손수 수군을 이끌고 가서 이들을 토벌했다’라고 해야 바른 해석이 되는 것이다.
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
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矜其忠誠, □遣使還告以□計
해석하면, ”영락 9년(CE 399년) 기해(己亥)에 백잔(百殘)이 맹서를 어기고 왜(倭)와 화통하였다.
왕이 평양으로 내려갔다. 신라의 사신이 아뢰기를, ‘왜인(倭人)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奴客)으로 하여금 왜의 민(民)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歸依)하여 명령을 내려
주시길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太王)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태왕의) 계책을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이다. 당시 수도는 평양성의 동쪽
황성이었고 평양성은 중국 랴오닝성 요양이었다. 태왕은 황성에서 평양성으로 내려가 신라를 왜
인들로부터 구원해 달라는 신라왕의 사신 얘기를 들었다.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했다는 백잔(百
殘)은 한반도 백제가 아니고 백제 사람들이 대마도로 건너가서 세운 백제의 분국이었다. 고구려사
람들은 백제인들의 분국을 韓地의 백제가 아닌 백제의 잔당국(殘黨國)이라는 의미로 그렇게 불렀
다. 사신을 보낸 신라는 서라벌 신라가 아니라 당시 대마도에 있었던 신라의 분국이었다.
한국의 고대 역사서 『태백일사(太白逸史)』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에 ‘임나가 나누어져
세 개의 가라 즉 좌호가라는 신라, 인위가라는 고구려, 계지가라는 백제에 속했는데, 영락 10년
(CE 400년)에 모두 고구려에 귀속되었다. 고구려가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를 모두 열 나라로 나누
어 연정으로 다스렸다’는 기록이 있다. 광개토태왕의 비문에는 영락 10년 태왕이 보병과 기병 5만
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의 교통은 수로가 우선이었다. 분국 신라의
사신도 육로가 아닌 배편을 이용해서 멀리 평양까지 태왕을 만나러 온 것이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
□□□□來背, 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始羅城□城, 倭滿倭潰. 城□□
□□ □□□□ □□□□ □□□□ □ □□□□□九 盡臣□來 安羅人戍兵
10년(400년) 경자(庚子)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
군(官軍)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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