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4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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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 분과 2


                 I. 서론




                   일본은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하면서 침략 명분을 하나 만들었다. 소위 ‘한반도 임나

                 일본부설’이라는 것으로 한반도의 일부가 예전에도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이다. 서기 369년
                 야마토 왜의 신공(神功) 황후가 한반도에 있는 임나(任那) 7국과 4읍을 점령, 4세기 후반부터 6세

                 기 중엽까지 약 200년간 지배했다는 기록이 일본의 역사책 『일본서기』에 적혀있다는 것이다. 그
                 러나 그런 사실은 없었으며 한국의 어떤 역사책에도 그런 기록이 없다. 식민지 시대 일본 정부는

                 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를 찾는다고 한반도 남부 가야 유적을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다니면서 귀
                 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마구 훼손시켰다. 그러나 아무런 근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해방 후 지금까지

                 한반도 임나일본부설은 그 근거가 없다는 것이 명백하게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재침략
                 의 목표를 가지고 있는 일본의 우익과 군국주의자들은 지금도 일본 학생들의 교과서에 임나일본
                 부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허위사실을 퍼뜨리고 있다. 우리는 이에 대응하여 한반도 임나일본부설

                 은 완전한 허구이며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조작하고 날조한 것이라는 것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 그들의 이론 자체가 엉터리와 모순 투성이라는 것을 철저히 규명하고 그들과의 논리 싸움에
                 서 승리함으로써 그들의 재침략 야욕을 철저히 봉쇄하고 말살시킬 필요가 있다.
                   임나일본부설을 처음 퍼뜨린 세력은 메이지 시대 일본군 참모본부였다. 1883년 만주지역에서

                 정보수집 활동을 하던 일본군 장교 사코우 가게노부는 그 지역에 아주 거대한 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공적을 아들 장수왕이 기록해 놓은 대단히 큰 비석이었다. 비문
                 속에 왜(倭)가 있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탁본을 떠서 일본으로 가져갔다. 사케 중위가 가져간 쌍구
                 가묵본은 일본군 참모본부에서 5년여 동안 분석을 한 후 1889년 아세아협회가 간행하는 회여록

                 이란 잡지에 소개가 되었다. 일본학자들은 일본에 아주 유리한 해석을 내놓았다. ‘야마토 왜(倭)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 임나, 신라를 공격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는 글이 광개토태왕의 비문 속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후 이에 대한 논문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그 대부분이 광개토태왕 비문
                 의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를 『일본서기』에 있는 신공 황후의 전설적인 내용과 관련지어 한반도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1905년 황성신문을 통해서 광개토태왕 비문의 내용이 우리나라에도 알려졌다. 그 후 한국학자
                 들의 반박이 이어졌다. 위당 정인보 선생은 비를 세운 주체가 고구려인데 ‘왜가 (고구려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했다. 백잔이 (왜와 연결해) 신라를 (침략했다. 신라는 고구

                 려의) 신민이었기에 (왕이 군대를 이끌고 백잔을 토벌했다)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주어가 너무 자

                 주 바뀌고 문맥이 매끄럽지 않아 정인보 선생은 한문의 문법도 모르느냐 등의 공격을 받았다. 북한
                 의 역사가 김석형은 ’왜가 신묘년에 (고구려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잔, □□, 신라를
                 격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다. 1972년 재일 사학자 이진희 교수는 탁본을 시기별로 분

                 류해보니 후대 탁본일수록 글씨가 선명하고, 다른 글자도 발견된다면서 일본이 석회를 발라서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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