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2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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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분과 1
국과는 다른 개념이며, 오히려 성(姓)과 본(本)이 같은 부계(父系)의 선조를 공동으로 하는 집단인
종중(宗中)에서 지파(支派)가 분가하며 이룬 일족(一族)인 문중(門中)의 관계와 맥을 같이 한다. 52)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평화적 합의와 절차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본 논문에서는 분국의 조건 다섯 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 건국 과정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
어져야 한다. 둘째, 기존 왕실과 새 왕실은 혈연적 또는 계통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셋째,
분국하는 국가는 반드시 새로운 곳으로 이주하여 건국해야 한다. 넷째, 국명(國名)의 연속성이 있
어야 한다. 다섯째, 본국과 분국은 불평등한 관계가 아니다. 이 가운데 평화적 합의와 절차가 제일
중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분국은 부여에서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라, 환국으로부터 분
국한 신시배달국의 건국 과정이 분국의 기원으로 볼 수 있으며, 부여가 이 전통을 계승 발전시켰다
고 할 수 있다. 북부여의 건국 과정은 기존 왕실과 혈연관계이고 새로운 도읍지에 건국했지만, 평
화적 합의나 동의가 선제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북부여는 분국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본다.
동부여 건국 과정에서 북부여의 왕이 된 고두막은 북부여 왕실과의 혈연적 관계는 없지만, 해부루
와의 평화적 합의를 통해 새 도읍지로의 천도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분국의 조건에 부합한다고
본다. 서부여의 건국 과정은 동부여의 국난 위기 상황 해결을 위해 신흥패권국인 고구려와 화친을
했고, 고구려는 이를 주도한 대소왕의 사촌 동생을 부여왕으로 인정한 것으로 모든 과정이 분국의
조건과 합치된다고 할 수 있다.
대소왕 사후 고구려에 투항한 대소의 사촌 동생과 1만여 명의 옛 동부여 유민들은 연나부 관할
지에서 새로운 부여(낙씨왕계)를 건국하였는데, 연구자는 그동안 부여국명이 ‘방향 + 부여’로 불
렸던 관례를 따라 ‘서부여’로 부르기를 제안하였다. 투항했지만 고구려로부터 새로운 부여왕이 되
었다는 것은 신흥패권국인 고구려와 편승동맹관계였을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 관계는 2세
기 초까지 유지되었다. 서부여는 군사권과 교역권을 갖고 있었고, 읍루를 신하국으로 복속시켜 세
금을 부과할 정도의 국력이 있었다.
부여 분국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모든 부여 왕실은 고두막한을 제외하고는 모두 해모수의
후손이다. 그러나 동부여를 탈출한 추모가 북부여(졸본부여)의 사위를 거쳐 졸본부여의 왕이 되었
으므로 고구려도 해모수와 혈연관계이고, 박혁거세를 낳은 파소 역시 해모수의 딸로 알려져 있다.
결국 삼국은 모두 북부여의 혈통으로 시작되었다.
왕권 시대에 왕조의 변경은 무력을 통해 권력을 찬탈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부여는 평화적 방법
으로 분국을 했고, 분국은 국가 또는 왕실의 위기 상황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부여의 강한 생존
력을 찾아낼 수 있었다. 즉 부여의 분국은 나라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내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
고, 오늘날 한민족의 근면함과 도전 의식에도 그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본다. 53)
52) 지양미(2022), 216쪽.
53) 지양미(2022), 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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