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자료실
『 환단고기』의‘쿠마소’(熊襲)와 옥산신사(玉山神社)
『 환단고기』의‘쿠마소’(熊襲)와 옥산신사(玉山神社)
월간개벽 2010.12
김철수
1. 단군성조가 평정한 웅습(熊襲,쿠마소)
역사의 수수께기, 큐수 사이토바루 고분군
또 하루가 밝았다. 어제 마지막으로 답사한 곳은 큐슈(九州)미야자키시(宮崎市)의 서북쪽에 있는 사이토바루(西都原) 고분군이었다. 시간에 쫓겨 저녁 어둑어둑할 무렵에 보았지만, 사이토바루 고분군의 81호 전방후원분은 아직도 또렷하게 내 눈에 잔상으로 남아 있다. 어쩌면 역사의 수수께끼에 한가닥 실마리를 제공한 고분이었기 때문이다(여기에 대해서는〈월간 개벽〉2010. 8월호를 보라). 여기는 경북 고령의 고분군처럼, 대부분 피장자가 누구인지 확인이 안되고 있는 곳이다. 1910년대에 7기를 발굴한 적이 있으나 이 역시 확실한 피장자가 누구인지 밝혀내지 못했다. 이런저런 설만 분분한 실정이다. 일본 사학자들 중에서는 이 고분군이 대륙의 도래족, 한반도 도래인들일 것이라 추정하는 자들이 많은 실정이다.
일제시대 역사를 연구했던 최남선은“동방문화의 시원상태는 ... 조선을 중심으로 하여 조선의 비장(秘藏)된 옛 문이 열림을 기다려서야 비로소 시작될 것”이라 했다. 곧 조선의 옛 역사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동방 각 문화의 시원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사이토바루 고분군이나 일본 고대사 역시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내용이 조선의 옛 도가사서인『환단고기』(桓檀古記)에 전해진다. 『환단고기』「단군세기」‘35세 단군 사벌(沙伐) 재위 68년’의 내용을 보자.
“BCE 723년 단제께서 장군 언파불합(彦波弗哈)을 보내 바다 위의 웅습(熊襲)을 평정하였다.”
(茂午五十年帝遣將彦波弗哈平海上熊襲)
웅습(熊襲,쿠마소)의 유래
“바다 위의 웅습(熊襲)”, 웅습을 일본어로는‘쿠마소’라 읽는다. 그리고 쿠마소는 일본 규슈의 남부 곧 사이토바루 고분군의 남쪽인 현재의 가고시마(鹿兒島) 지역을 중심으로 한 그 일대를 지칭한 명칭이었다. 『환단고기』에는 바로 이 쿠마소를 BCE 723년에 사벌단군이 언파불합 장군을 보내 평정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된 것이다. 일본 고대사로 본다면, 쿠마소는 오사카(大阪)와 나라(奈良)가 있는 긴기(近畿) 지역에 최초로 형성된 야마토(大和) 정권 이전부터 존재해온 나라였다.
아직도 가고시마 일대에는 쿠마소와 관련된 지명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현재 큐슈 가고시마현의 고쿠분(國分) 지역에 조성된 성산공원(城山公園)은 원래 쿠마소성(熊襲城) 뒷산 일대를 공원으로 만든 것이다. 이 쿠마소성 근처에는 가야신(伽倻神)을 제신으로 하는 한국우두봉(韓國宇豆峰. 가라쿠니우도우미네) 신사도 있다. 쿠마소성이 있는 산자락에서 북쪽으로 보면 우두봉(宇豆峰)이 있고, 한국우두봉 신사는 초라한 형태이지만 그 산 자락에 있는 것이다. 또 가고시마현 아이라군(良郡) 하야토 마을 북쪽에 묘견(妙見)온천이 있는데 그 산마루에도 쿠마소라는 커다란 굴이 있다. 소위 웅습굴(熊襲窟)이라 한다.
하야토의 원래이름은 웅습(쿠마소)
그리고 하야토 마을에는 이 쿠마소족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한 하야토 무덤( 人塚)이 있다. 이 하야토 무덤의 옛 이름은 쿠마소 무덤(熊襲塚)이었다.
쿠마소와 하야토! 그런데 하야토 마을의 하야토( 人)는 무엇일까? 이는 쿠마소 지역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환단고기』에 기록되었듯이 단군성조가 평정한 쿠마소, 그리고 이곳에 거주하던 하야토. 뭔가 관련이 있을 성 싶다. 한국의 원로 재야사학자 김향수는‘쿠마소와 하야토는 한반도와 그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라 했다. 왜냐하면 쿠마소는‘곰(熊)의 습격(襲)’과 같은 우람한 도래족의 위세를 나타내는 말이고, 하야( )는 원 뜻이 맹금류인 보라매로서‘하야토(人)는 독수리 인간, 즉 독수리나 매처럼 하늘에서 날아온 인간’이라는 말이기 때문에 한반도 도래인을 칭하는 말이라고 그 근거를 들었다.
우리는 쿠마소, ‘곰의 습격’이라는 말에서도 한민족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이 말 속에는 이미 고대 곰 토템을 지녔던 한민족이 이곳으로 도래하여 평정하였음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쿠마(熊), 즉 곰은 바로 고조선의 건국시조인 단군성조를 잉태한 곰족 토템의 부족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리고 고대 한자 자전『설문(說文)』에 따르면‘습(襲)’은 원래‘시신에 입히는 옷’, 수의(壽衣)를 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옷을 덧입다’‘거듭하다’‘이전 것을 따라 하다’는 의미로 발전했다. 여기에서‘계승하다’는 뜻이 나왔던 것이다. 자식이 선대의 봉작(封爵)을 물려받은 것을‘습봉(襲封)’이라 했고, 관직을 물려받는 것을‘습직(襲職)’이라 일컬었다. 이런 의미라면 웅습(熊襲)은 곰족의 전통을 물려받았음을 뜻하는 것이다.
쿠마소로 들어온 세력은 이곳에 살던 왜소했던 사람들과는 판이하게 곰같이 거대한 9척 장신의 거인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 이 지역을 습격하였기 때문에 음(音)이 같은 웅습(熊襲)으로 불렸던 것이다. 그 후 이 지방에는 가야인·신라인 등 한반도로부터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이미 쿠마소에 거주하던 이들 선주(先住) 세력과 공존·동화되어 나갔다. 그리고 점차 상당수가 야마토 민족에 동화되어서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단군, 쿠마소를 평정하다
이렇게 본다면 일본 고대 역사가 바로 고조선 시대부터 한민족과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민족 역사는 삼성조 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 환인의 환국, 환웅의 신시 배달 그리고 단군의 고조선으로 이어졌다. 환국은 7대 환인이 3,301년간 통치했고, 배달은 18대 환웅천황이 1,565년간, 그리고 고조선은 47대의 단군이 2,096년간 통치하여 고대사에 전성기를 누렸다. 고조선 시대의 35세 사벌(沙伐) 단군은 68년간 재위하였고, 재위 50년인 곧 서기전 723년에 언파불합 장군을 보내 해상의 쿠마소를 평정하였던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36대 매륵(買勒) 단군은 재위 38년(BCE 667)에 협야후 배반명을 보내 해상의 적을 토벌하였고, 12월에는 삼도(三島미시마)를 모두 평정하였다“( 甲寅三十八年遣俠野侯裵반命왕討海上十二月三島悉平”『환단고기』「단군세기」). 보통 삼도(三島)는 일본열도가 혼슈(本州), 시코쿠(四國) 그리고 큐슈의 세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어 일본열도를 뜻한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나, 나는 개인적으로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의견을 개진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또 같은 내용이『태백일사』「삼한관경본기」‘마한세가 하’에도 기록되었다. “갑인(BCE 667)년에 협야후에게 명하여 전선 500척을 거느리고 해도(海島)를 거쳐 왜인의 반란을 평정하였다”(甲寅命陜野侯率戰船五百往討海島定倭人之叛).
그러면 여기서 쿠마소를 평정한 언파불합 장군, 삼도(三島)를 평정한 협야후 배반명이 누구인가를 밝혀보는 일도 궁금할 것이다. 여기서 자세하게 논할 자리는 아니지만, 우선 나의 견해를 간단하게만 피력해 본다면, 쿠마소를 평정한 언파불합 장군이라 함은 일본왕의 제일 상단에 있는 초대 신무왕(神武王)의 아버지로 추정된다. 물론 신무왕 및 그를 1대로 해서 일본이 조작한 만세일계(萬世一系)의 계보가 허구로 꽉 채워진 것이긴 하지만. 그리고 협야후도 삼도와 함께 추후 설명하겠다.
일본 서기의 쿠마소 기록
일본왕의 계보를 따라 내려오다 보면 시기적으로 좀 후세의 일이지만, 『일본서기』(日本書紀)에도‘쿠마소’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제14대 중애왕(仲哀王) 8년 9월조에 있는‘쿠마소(熊襲) 정벌’내용이 그것이다. 중애왕의 재위기간은 일본 역사서에 192~200년이라 기록되었다. 하지만 일본 역사가들도 모두 인정하고 있듯이 일본 초기 왕들은 실재하지 않은 가상의 왕들이며, 또 일본의 고대사를 한반도 및 중국의 역사와 꿰맞추기 위해 초기 왕들의 재위기간은 2주갑(약120년) 상향 조정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한다면 중애왕의 재위기간은 대략 312~320년으로 볼 수 있다.
중애왕의 사망 직전에 이루어진‘쿠마소 정벌’의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쿠마소가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쿠마소를 치려 했다. 군신에게 명하여 쿠마소를 칠 것을 의논하라 하였다. 그때 신(神)이 나타나 말하길“왕은 어찌하여 쿠마소가 복종하지 않는 것을 걱정하는가. 이는 여육의 공국(空國)이다.”그런데도 왕은 믿지 않고 무리하게 쿠마소를 쳤으나, 결국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즉 일본의 제14대 중애왕때 쿠마소가 복종하지 않아 큐슈로 내려가 정벌했으나 실패하였음을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또 흥미로운 것은 이 기록을 더 따라가 보면, 이 쿠마소가 신라와 연결되었음도 알게 된다. ‘신라가 일본과 가장 가까웠고 그 세력도 대단히 강했다. 쿠마소가 이따금 불복한것도 이 신라가 부추겼기 때문이다. 신라를 굴복시키면 쿠마소도 저절로 평정되리라 여겼다. 곧 뒤에 신라가 일본의 위력에 굴복했으므로 쿠마소도 자연히 조용해졌다.’바로 여기서 신공왕후라는 듣도 보도 못한 무녀격의 세력자가 등장하여 신라정벌이라는 뜬금없는 역사왜곡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많은 일본학자들도 의문을 나타낸 기록이었고, 최근 한일공동역사연구회에서는 분명히 왜곡된 역사기록으로 확정해버렸다는 소문도 들린다. 신공왕후는 중애왕의 왕비였다.
일본 초대국가 야마토 정권의 확립과정
왜곡된 기록이긴 하지만, 좀 더 보면 이 신공왕후가 소위‘신라정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북큐슈에서 아들을 낳았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가 바로 15대 응신왕(應神王)이었다. 응신왕은 야마토 왜의 굳건한 기반을 마련한 왕으로 잘 알려져있다. 응신왕의 통치기가 되자 한반도로부터 많은 도래인들이 일본열도로 들어왔고, 백제로부터 아직기와 왕인 등도 와서 학문을 전했다. 비로소 일본열도에 고대국가가 꽃핀 시대였던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일본서기』에 기록된 신공왕후의 신라정벌 기록은 몇가지 숨겨진 사실을 왜곡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선 그것은 한반도로부터 도래한 세력들이 일본 고대 최초의 국가인 야마토 정권을 확립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한반도로부터 인연을 끊기 위해 왜곡한 기록이었다.
이 응신왕과 관련하여『환단고기』「태백일사」‘대진국본기’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진다.“ 정주(正州)는 의려국(依廬國)이 도읍한 곳인데 선비(鮮卑) 모용외(慕容)에게 패배한 후 핍박받을 것을 근심하여 자살하려다가 문득 생각하기를 ‘내 혼이 아직 꺼지지 않았으니 어디에 간들 이루지 못하랴’하여 몰래 아들 부라, 곧 의라에게 부탁하고 백랑산(白狼山)을 넘어 밤에 해구(海口)를 건너게 하였더니 따르는 사람이 수천이었다. 마침내 바다를 건너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자칭 삼신의 부명(符命)에 응한다 하고 군신으로 하여금 하례의 의식을 올리게 하였다.”
(正州依慮國所都爲鮮卑慕容所敗憂迫欲自裁忽念我魂尙未泯則何往不成乎密囑于子扶[依]羅踰白狼山夜渡海口從者數千遂渡定倭人爲王自以爲應三神符命使群臣獻賀儀)
또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혹자가 말하길‘의려(依廬)왕이 선비에게 패배하여 바다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아들들이 도망하여 북옥저를 지키다가 이듬해에 아들 의라(依羅)가 즉위하니 이 뒤로부터 모용외(慕容)가 또 다시 나라사람들을 노략질하였다. 이에 의라가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드디어 왜인들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고.”(或云〈依慮王爲鮮卑所敗逃入海而不還子弟走保北沃沮明年子依羅立自後慕容又復侵掠國人依羅率衆數千越海遂定倭人爲王〉) 이 기록을 보면 앞서 야마토 왜를 반석위에 올려놓은 응신왕이 누구인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응신왕은 곧 의라였다. ‘응신’(應神)이라 한 것은‘삼신의 명에 응한다’는 뜻이었음도 알게 된다.
한국의 심복, 쿠마소
다시 쿠마소 정벌 내용으로 돌아가 보자. 여기서 쿠마소를 ‘여육의 공국’이라 함은 무슨 뜻이었을까? 여육은 고굉(股肱)의 뜻이기도 하다. 즉 가장 신임하는 중신의 뜻이고 수족과 같은 심복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공국(空國)은‘가라쿠니’라읽는다. 이것은 가라韓를 가라空로 바꾼 것이었다. 이러한 예들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가라쿠니 신사(韓國神社)에서 한국(韓國)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음이 같은 가라쿠니 신사(辛國神社)로 바꾸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고굉의 한국’은 곧 한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쿠마소 지역으로 들어가 한민족이 이룬, 그리고 한민족의 뜻을 따른 나라였다. 이들의 특징 중 하나가 전방후원분을 광범위하게 남긴 것이며, 이들이 원래 큐슈 동남쪽 일대의 쿠마소에 있다가 동쪽인 긴기(近畿)의 야마토 지역으로 이동하였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쯤 끌고 왔으면, 서두에서 제기한 사이토바루 고분군 그리고 81호 전방후원분에 묻힌 피장자들이 누구인가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일본열도로 건너와 큐슈 남단의 쿠마소에 터전을 잡았던 한민족의 한 무리. 때문에 81호 고분에서 발견된 토기 하나가 3세기 작품으로 밝혀지면서 일본열도의 전방후원분 역사에 파문을 일으켰던 것이다.
2. 높은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천손
천손강림신화의 원조, 큐수 웅습(쿠마소)
일본의 석학인 우메하라 다케시(梅原猛)는 일본의 천손강림 신화를 분석하면서 이곳 큐슈 쿠마소 지역이 바로 천손족이 들어와 정착한 지역이라고 했다. 곧 아마테라스오오가미(天照大神)의 후손인 니니기노미코토(瓊瓊杵尊)가 천손족을 이끌고 볍씨와 선진 농경기술 및 양잠 재배기술을 가지고 한반도로부터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큐슈 남단 노마(野間) 반도의 가사사(笠沙) 곶에 상륙했다. 그러나 이곳 기리시마(霧島) 지방의 자연조건이 농경에 적합하지 못했기 때문에 큐슈 남동부, 현재의 미야자키현 니시우스키군(西臼杵郡)의 다카치호(高千穗) 지방으로 이동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렇듯 일본의 천손강림 신화도 큐슈 지역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니시우스키 지역은 우리가 어제 점심 무렵에 둘러보았던 곳이었다. 이 지역에는 다카치호 신사(高千穗神社), 아마노이와토 신사(天岩戶神社), 구시후루 신사( 觸神社) 등 천손강림 신화와 관련된 유적지가 세워져 있는데, 그중 다카치호 신사를 들렀던 것이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이를 좀 더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고사기』(古事記)를 보면, 니니기노미코토가 고천원(高天原다카마노하라)에서 내려온 곳이 바로 규슈의‘히무카(日向) 다카치호(高千穗)의 구시후루다케(久士布流多氣)’라 했다. 또『일본서기』에는‘소호리산 봉우리(添山峯)’라고도 했다. 고천원에서 일본 땅으로 내려온 니니기노미코토는 아마테라스 오오카미(天照大神)의 후손이다. 아마테라스 오오카미의 후손인 신무(神武)가 일본의 초대 왕이 되었기 때문에, 아마테라스는 일본 왕실의 조상신‘( 황조신皇祖神’이라 한다)이 되었다.
니니기노미코토는 높은 하늘나라[高天原]에서 내려올 때, 거울·칼·구슬이라는 세 가지 신의 보물[삼종三種의 신기神器]을 갖고, 다섯 부족의 신[오반서五伴緖. 오부신五部神]을 거느리고 왔다. ‘삼종의 신기’는 환웅천황이 지상에 내려올 때 천부인(天符印) 3개를 가지고 왔다는 내용과 유사하다. 또한 5부 조직은 고대 한국의 5부(部) 조직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즉 고구려 지배계급은 소노(消奴)·절노(絶奴)를 중심으로 5부로 나뉘었고, 백제 역시 도성을 상·중·하·전·후라는 5부로 나누었다. 그리고 각 부마다 다섯 지역으로 구획하여 각 지역에 5천 명의 군사를 두었던 것이다.
천손의 고향, 고천원은 한반도
니니기가 일본열도에 내려온 일본신화의 무대인 다카치호가 실제 어디인가는 일본 고대사를 주목하는 사람들에게 큰 관심거리였다. 또 학자들에 따라서 비정하는 지역도 다양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에 앞서 미리 이야기해 둘 것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현재 다카치호의 구시후루다케, 곧 일본인들이 천손강림지라 주장하는 지역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일본학자들은 천손강림지를 큐슈 남쪽 기리시마 산지에 있는 다카치호봉 꼭대기나 규슈 중부에 사람들이 접근하기 힘든 산속 깊숙이 있는 니시우스키의 다카치호 지방으로 보고 있다. 곧 산꼭대기나 사람이 접근하기 힘든 산지로 고천원에 있던 천손의 후손이 내려왔다는 이야기다. 고천원, ‘높은 하늘나라’에서 일본열도로 내려온 곳이 하늘 가까이에 있는 산꼭대기나 산지라는 말이고보면, 한편 그럴 듯하다. 이는‘높은 하늘나라’를 그대로 저 푸르디 푸른 창공의 하늘을 가르킨 것으로 보았으니 말이다. 일본인들로서는 그리 생각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겠는가! ‘높은 하늘나라’는 일본열도로 이주하기 이전 그들이 고향을 말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강림’은 상대적으로 높은 문화적 수준을 지닌 나라의 천손민족이 문화수준이 낮은 지역으로 이동하였음을 뜻한다. ‘일본 신도는 삼한의 제천문화의 유습’이라 주장하여 필화사건을 일으켰던 동경제국대학의 구메 쿠니다케(久米那武)는“천손강림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황손이 윗나라(上國)로부터 아랫나라(下國)로 내려온 것이라고 본다”라고.
그러면 높은 하늘나라 곧 윗나라(上國)는 당연히 한반도를 말함이다. 일본학자들은 곧 한반도로부터 도래한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것이다. 때문에 하늘에서‘뚝’산봉우리로 떨어진 하늘 민족임을 내세우고 싶었다. 따라서 일본학자들은 가급적 사람이 살 수 없는 산꼭대기, 사람이 접근하기 힘든 산지 그리고 가급적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큐슈 남쪽지방으로 천손강림지를 비정하고 싶은 것이다. 이는 참된‘높은 하늘’을 숨기려는 전략이다.
‘높은 하늘나라’가 한반도를 가리킨다는 사실은 천손강림신화 그 자체 내용 속에서도 여럿 발견된다. 우선 니니기가 내려온‘구시후루’는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이 내려온‘구지봉’(龜旨峰)을 말한 것이다.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김수로왕이 구지봉에 내려왔다고 기록되었다. 구시후루봉은 언어로 보아이 구지봉과 매우 닮은 꼴을 지녔다.‘ 일본민족은 한반도를 통해 건너온 기마민족이라는 설’을 주장한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도 이러한 유사점에 주목하였다. 그는 일본의 천손강림신화에서‘구시후루봉’과‘소호리’의 의미를『가락국기』에 바탕하여 풀어나갔다. 한국어로‘후루’는‘마을’(村)이다. 그러면‘구시후루’는‘구지의 마을’이 된다. 그리고‘소호리’는 ‘도읍’(都)이었다. 백제의 도읍은‘소부리’이며 신라의 도읍은 ‘셔블’이었다. 일본의 천손강림 신화는 김수로왕의‘천손강림신화’와 등장하는 지명이 비슷한 것이다.
또 다른 내용도 있다. 아마테라스 오오가미의 손자인 니니기노미고토는 고천원을 출발하여 자신이 내려와 도착한 곳을 이렇게 표현했다. “여기는 카라구니(韓國)를 향하고 있고, … 아침 해가 바로 쬐는 나라, 저녁 해가 비치는 나라이니라. 그러므로 여기는 매우 좋은 땅”이라고. 우메하라 다케시는 이‘한국’을 말 그대로 한반도라 받아들였다. 당연한 지적이다. 이를 에도(江戶)시대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처럼, 천손강림지를 미야자키현의 타카치호미네(高千穗峰1,574m) 봉우리로 비정하여『고사기』의‘한국’을 다카치호봉 앞에 위치한 가라쿠니다케(韓國岳1,700m)라 해석하는 것은 참으로 눈물겨운 왜곡의 흔적일 뿐이다. 또한 다카치호 신사, 아마노이와토 신사, 구시후루 신사 등 천손강림 신화와 관련된 유적지를 만들어 다카치호 봉우리와 서로 진짜 천손강림지라 주장하는 미야자키현 우스키 지역 역시 힘겨운 주장에 불과하다.
고대 큐슈는 한민족의 터전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 큐슈 땅은 일본의 어미 땅으로 일본문화 발상지이며 일본 신화의 땅이라는 사실이다. 고대에 큐슈 지방은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한민족의 터전이었을 것이다. 한반도로부터 이주한 한민족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던 지역이었다. 때문에 큐슈의 이곳 저곳에 소위 천손강림지라 비정되는 장소들이 있는 것이다. 우리 고대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지역 큐슈. 대륙으로부터 기마민족들이 들어왔고, 가야·백제·신라·고구려 백성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나름대로 생활을 꾸려 갔던 곳이다. 벼농사로 대표되는 야요이(彌生) 문화가 시작된 곳도 이곳이다. 큐슈 북부의 옛 이토국(伊都國)이 위치해 있던 지역에는 가야산, 가라쯔, 게야, 시라기 등 한반도와 친숙한 지명들이 있다. 또한 중국의 동북방과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는 지석묘도 많고, 일본에서 다량의 동경(銅鏡)이 출토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큐슈 사가(佐賀)현 간자키(神崎)군에 있는 요시노가리(吉野ヶ里)는 BC 5~AD 3세기의 유적으로, 한반도 문화의 일본 전파 양상을 보여주는 야요이 시대 고대 유적지이다. 이유적은 환호집락(環濠集落)으로 수공업 생산, 제사터 등의 장소가 있고, 출토된 유물 대부분이 한반도에서 발견된 것과 같았다. 또 여기서는 볍씨 자국도 발견되어 일본 최초로 벼농사가 시작된 곳으로 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몇몇 조사연구들도 “요시노가리는 외국인 집락”(타케우찌타가오武內孝夫, 『현대』1995.2)이며, 이곳에서 출토된 사람의 뼈[人骨]는 기원전 3세
기 외국인의 모습으로“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계의 사람들”(아사히朝日신문 1989.9.3)임을 밝혀주기도 했다.
일본 국립민속학박물관의 오야마 슈죠(小山修三) 교수는 인구변화에 주목한 학자였다. 그는 죠몬시대(繩文時代. BCE 4세기) 말기에 일본열도의 총인구가 약 7만 5,800 여명이었는데, 야요이 시대로 들어갈 무렵에는 갑자기 59만 4,900 여명으로 증가하였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큐슈 땅으로 야요이인들이 이동한 것이 소위 천손강림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들이 큐슈 지역을 발판으로 세력을 키워 동쪽으로 정벌[東征]을 시작했고, 긴기 지역으로 들어가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 야마토 왜 정권을 열었던 것이다. 이것이 소위 일본의 초대 왕인 신무의 동정(東征)설화이다. 일본 열도의 서쪽에 있는 큰 섬 큐슈 땅은 이렇듯 한반도로부터 한민족을 받아들여 성숙시켜 야마토 왜와 일본왕실의 토대를 만든 어미 땅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큐슈의 땅 남단에 있는 쿠마소 지역, 현재의 가고시마 지역 일대도 이래 저래 한민족과 관련이 없을 수 없었다. 우메하라 다케시의 설명처럼, 바다를 건너 노마 반도의 남단가사사 곶으로 들어온 한민족의 일파가 쿠마소 지역에서 활동하다 니시우스키의 다카치호 지방으로 이동했을 가능성도 분명 있을 것이다.『 환단고기』에서 말한 쿠마소(熊襲) 지역, 앞서 보았지만 이곳에는 고대에 그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하야토들이 살았던 지역이다. 나는 그들과 사이토바루 고분군이 관련되었다고 본다. 사이토바루 고분들은 바로 이들의 무덤이었을 것이라고.
3. 단군성조를 모신 옥산신사
한민족의 삼성조를 모신 일본 신사들
그래서 그런가. 일본 고대사에 한민족과의 비밀을 간직한 옛 쿠마소 지역은 이후에도 계속 한민족과 관련을 맺어왔다. 큐슈지역에는 한민족의 삼성조(환인, 환웅, 단군성조)를 모신 신사들이 몇 개소 있다. 그 중 대표적인 하나가 북규슈 후쿠오카현 소에다 마을(福岡縣添田町)의 영언산(英彦山히코산)에 위치한 환웅의 수험도 영정이 있는 히코산 신궁(英彦山神宮)이다. 신앙의 대상은 등원환웅(藤原桓雄)으로, 주지하다시피 환웅천황은 인간세상을 교화하기 위하여 태백산에 내려온 신이다. 이 한국의 환웅신앙이 일본 영언산에 전파된 것이다.
그리고 또 대표적인 한 곳이 이곳 옛 쿠마소 지역인 가고시마(鹿兒島)의 나에시로가와(苗代川)에 있는 옥산신사(玉山神社)이다. 옥산신사를 보기 전에, 어떻게 이곳에 옥산신사가 세워지게 되었는가를 살펴보자. 가고시마 지역은 막부 때에 사쓰마번(薩摩藩)이었다. 번(藩)이라면 일본 중세시대 쇼군(將軍)이 지배하는 막부(幕府) 체제하에서 지방정권이었으며, 당시 일본에는 260개 이상의 번이 있었다. 그 중에 사쓰마번은 시마즈(島津) 가문이 규슈의 최남단 가고시마 일대를 영지로 삼은 비교적 큰 번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사쓰마 제18대 번주(藩主)였던 요시노가리 유적 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제 4군(병력 1만 5000명) 대장이었다. 조선침략을 지휘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병사하자 왜군은 철수를 서둘렀다. 이때 왜(倭)의 제1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순천에서 탈출을 기도했지만, 이순신 장군에 의해 퇴로를 봉쇄당했다. 고니시는 사천 왜성에 주둔하고 있던 시마즈에게 화급하게 구원을 요청했고, 시마즈는 고니시를 구원하기 위해 500척의 대함대를 거느리고 순천방면으로 출진했다. 시마즈 함대가 서진(西進)해 오자 이순신 장군은 지금의 남해대교 해역에서 격파했는데, 이것이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해전(1598년 11월 29일)이었던 것이다.
이 때 시마즈 요시히로는 퇴각하면서 조선 도공 80여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중 40여명은 북규슈 사가현 가라쯔(唐津)해안에 도착해 사가(佐賀)와 나가사키(長崎), 구마모토(熊本)로 흩어져 정착했고 나머지 40여명은 시마즈를 따라 남규슈로 내려왔다. 당시 조선 도공들은 노예처럼 끌려왔다. 옛날 일본 목선은 가벼워서 원래 배 밑바닥에 시루를 실어 무게 중심을 잡았으나, 이 때는 시루 대신 도공 등 조선인을 배 밑에 태워 일본으로 온 것이다. 말하자면 노예선이었던 셈이다.
잡혀온 그들은 가고시마시의 갑돌천(甲突川코츠키가와)에 있는 고려교(高麗橋)라는 다리 주변에‘고려마을’(高麗町)을 이루고 살았다. 이후 이들은 도자기를 빚을 흙을 찾아 미야마(美山)의 나에시로가와(苗代川)로 옮겨 살면서 여기에 조선 도자기 문화를 꽃피우게 된 것이다. 이곳이 바로 조선 도자기의 맥을 일본열도에 전한 심수관의 도원(陶苑)이 있는 지역이다. 이렇게 해서 미야마의 수관도원은 규슈 사가현 아리타(有田)지방에서 계룡산 부근(학봉리 가마터)의 분청사기의 맥을 잇는 이참평(계룡산 박정자 삼거리에 기념비가 있다)의 도자기와 더불어, 일본열도에 양대 도자기 마을을 이루었던 것이다.
미야마로 들어간 한민족의 도공들
미야마로 들어간 한민족의 도공들은 한민족의 명맥과 혼을 잇기 위해 수관도원 근처에 옥산신사를 세워 단군을 제신으로 모셨다. 혹은 환단신사(桓檀神社)로 부르기도 했다. 옥산(玉山)이란 이름은 평양에 단군릉이 있는 지역의 이름이다.
미야마의 나에시로가와에 정착한 조선인들은 옥산신사를 언제 세웠을까? 정확치는 않으나 대략 1605년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에는 한민족 고유의 제천의식과 같은 풍습으로 단군성조를 모셨다. 제주(祭主)는 한민족의 도포를 입고, 한국음식과 함께 제기(祭器)와 악기도 한국 고유의 것을 썼다. 그러나 메이지(明治) 시대(1868~1912)로 들어서면서 신사정리 정책에 따라 촌사(村社)로 대우를 받고, 조금씩 조금씩 건물형태도 신사 형식으로 바뀌었다. 촌사는 신사의 위계서열상 낮은 위계로 일정한 한 마을사람들이 모시는 신사를 말했다. 1917년 개축시에는 남향으로 되어 있던 건물도 완전히 일본풍으로 변해버렸다. 원래 신사 건물 입구에 있었던 도자기로 만든 용이 감고 있는 둥근 기둥도 사라져 버렸다.
1867년 기록된『옥산궁 유래기』에 의하면, 평양 옥산묘의 신인 단군성조가 바다를 건너와서 그들을 보호하는 신이 되었다 한다. 즉 고조선의 시조인 단군성조가 이곳 보호신으로 모셔진 것이다. 특이한 것은 단군성조의 성격이다. 기록에 따르면,‘ 그 신(단군성조)은 밤마다 산 위에서 불기[炎氣]를 뿜어대며 기이한 현상을 많이 나타냈다.’그들은 단군성조를 국조로서가 아니라 직업과 관련된 불의 신으로 모셨던 것이다. 메이지 35년(1902) 3월 8일 부의 명세장을 보면, 모셔진 신(단군성조)이 발광하여 주위에 환한 빛을 비추었을 뿐만 아니라 진동하여 주변을 흔들기까지 했다. 그리고 여기 모셔진 신체(神體)는 보통 사람의 키 높이 정도되는 자연석이며, 그 신체석 주변에는 마을 사람들이 조그마한 돌을 쌓아 놓았다. 마치 우리나라의 성황당이나 당산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옥산신사는 심한 변화를 겪게 된다. 1902, 3년경에 일본정부는 일본의 고전『( 일본서기『』고사기』등)에 이름이 나오지 않은 신사는 음사이기 때문에 폐사해야한다는 통보를 전국에 전했다. 1904년 러일전쟁을 눈앞에 둔 시점이었다. 일본정부는 신사통폐합을 통해 사상적 통일을 꾀 했던 것이다. 미야마 지역 주민들은 통보를 접하고 지혜를 모았다. 그들은 교토(京都) 제국대학 출신의 엘리트였던 12대 심수관을 도쿄(東京)에 보내 정부 교관들과 교섭을 벌였다. 그리하여 옥산신사에 다른 신사를 합사시키는 방법을 택하여 1902년에 주변에 있는 검(劍)신사가 편입되면서 신사가 폐지되는 것은 모면했다.
이에 따라 제신(祭神)과 제의(祭儀)도 변했다. 지금까지 제신은 단군성조였고 제의도 조선어로 축문을 읽으며, 악기도 한국의 것을 사용했었다. 검신사의 신은 스사노오노미코도(素盞鳴尊)였다. 검신사와 합사되면서, 이 때부터 옥산신사에는 단군성조와 함께 스사노오가 합사되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스사노오의 아들 이다케루노미코도(五十盟命)도 모셔졌다. 스사노오와 그 아들 이다케루노미코토는 모두 신라국 소시모리에 살다 이즈모국(出雲國)으로 건너간 소위 신라계의 신들이다(이들에 대해서는 추후 설명할 예정이다). 제의형식도 일본식으로 바뀌었다.
단군성조를 모신 옥산신사는 이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미야마 주변인 가고시마현 카노야 마을(鹿屋町) 카사노하라(笠野原)에도 있다. 이는 미야마의 나에시로가와에 인구가 많아지면서 모두 수용하기가 어려워 1704년에 가사노하라로 일부를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이 마을로 이주한 사람들도 단군성조를 모신 옥산궁(玉山宮)을 지었던 것이다.
조선 도공들의 망향가
옥산신사의 제사(마쯔리) 때는 신이 내리는‘하타’라는 신간(神竿)을 두 개 만든다. 두 칸 반 정도의 대나무에 방울을 달고 그 밑에다 일월(日月)과 승룡(昇龍)과 호랑이가 그려진 깃발을 달았다. 한민족이 예부터 10월에 모셔왔던 천제 기록을 보자. 마한에는‘별읍(別邑)을 두었고 이를 소도(蘇塗)라 했으며, 여기에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신을 섬겼다’“( 信鬼神,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 名之天君. 又諸國各有別邑. 名之爲蘇塗. 立大木, 縣鈴鼓, 事鬼神.”『三國志』‘魏誌東夷傳韓’)고 했다. 유사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제삿날 아침에는 목욕재계를 한 신관(神官)이“교구산구 손반지, 산지멘타”라 주문을 외우며 신전의 문을 연다. 오전에는 각 집의 여성들이 한국 떡(高麗餠코레모찌)라는 시루떡과 막걸리를 신궁으로 갖고간다. 신관은 떡을 받아 신께 바치고 난 뒤에는 징을 치고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며 다시 돌려준다. “아보란 난나시 이쿠마도, 고쿠사오, 사무바치, 헤이가라, 헤이와라, 타이세이, 오호미사, 토라세센.”한국말일 듯 싶은데 아직 무슨 뜻인지 아무도 모르고 있다.
그리고 옥산신사에는 한국어와 관련된 제문(祭文) 및 노래도 많이 남아 있다. ‘어신행축사’((御神幸祝詞)‘ 축사’(祝詞)‘ 신락가’(神舞歌)‘ 학구무가’(鶴龜舞歌) 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그중 학구무가는 보통 마을 처녀 4, 5명이 원을 그리며 춤을 추면서 불렀던 노래로, ‘오나리, 오나리소서’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일본의 저명한 소설가였던 시바 료타로(司馬遼太1923~1996)를 비롯한 한국의 여러 문인들(김승한, 신봉승, 김충식 등)이 나에시로가와를 소개하면서 이 노래를 나름대로 풀어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조금씩 모두 다르지만 큰 뜻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학구무가는 모두 4절로 되어 있고 가사는 한자로 적혀 있지만 왼쪽 옆에는 한글이, 오른쪽 옆에는 일본어로 적혀 있다. 그 중 잘 알려진 1절만을 살펴보자.
오늘이 오늘이라 (오늘이 단군 제삿날이다)
제물(祭物)도 차렸다
오늘이라 오늘이고나 모두 함께 노세
이리도 노세 이리도 노세
제일(祭日)이 제일(祭日)이라(오늘이 제삿날이다)
우리 어버이 단군은 잊지 않으리라
고수레 고수레 자나 깨나 잊지 않으리
이것은 김충식의『슬픈열도』(효형출판, 2006)에 실린 번역이다. 이와 비슷한 노래는 조선 초기의『금합자보(琴合字譜)』와 중기의『양금신보(梁琴新譜)』그리고 후기의『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실려 있었다. 때문에 이 노래는 임진왜란 당시부터 조선후기까지 유행했던 인기가요였을 것으로 추정되며(정광,“ 오나리攷-임진왜란 때에 납치된 묘대천 한인들의 망향가”『문학과 언어의 만남』, 신구문화사, 1996), 이것이 임진란 때 끌려간 도공들에 의해 제사 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재일 작가 및 역사연구가였던 고 김달수는 이 노래와 제문은 조선도공들이 봄과 가을에 언덕에 올라 연회를 베풀며 불렀던 망향가였다고 했다.
일본 근대사를 연 쿠마소 지역 (현 가고시마)
『환단고기』에 나타난 쿠마소 지역, 이 지역은 이렇듯 고대부터 한민족과 연결되었던 땅이었고,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도 한민족의 한이 서린 지역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일이었을까? 이 지역은 일본 근대사에 격동의 현장, 1868년의 메이지 유신을 가능케 했던 강력한 힘을 준 사쓰마번이었다. 사쓰마번은 예나 이 때나 변함없이 외부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역할을 한 곳이었다. 때문에 일본에 기독교 문화를 처음 전했던 프란시스코 사비에르(1506~1610) 수도사(修道士)도 이곳으로 왔고, 근대 서구문명의 상징이었던 조총이나 군함도 이곳 가고시마로 들어왔다.
뿐만 아니라 옛 쿠마소 지역인 가고시마는 일본 근대사의 주역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었다. 메이지 유신의 세 인물[유신3걸維新3傑]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중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가 이곳 가고시마 출신이다. 특히 사이고 다카모리는‘마지막 사무라이’로 회자되며, ‘담력의 사이고, 지혜의 오쿠보’라든가‘사이고는 영웅, 오쿠보는 정치가’라고 이야기된다. ‘변명하지 마라, 의리를 중시하라, 밀어붙여라.’이는 사쓰마 남자를 말할 때 통상 붙이는 표현이다. 때문에 혹자들은 사쓰마 남자를 한국의 경상도 남자와 비교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조선에서 끌려온 도공들이 모여 살았던 갑돌천을 끼고 있는 이 마을, 바로 이곳이 유신(維新)의 최고 원훈(元勳)이며 일본 무사를 대표하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 등이 태어나 자란 지역이다. 또 바로 이웃엔 러일전쟁 때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궤멸시킨 도고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의 탄생지도 200∼300m 안팎의 거리에 있다.
사벌 단군이 평정했던 쿠마소,
한반도로부터 도래인들이 모여 살았던 큐슈 남부지역,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 도공들이 단군성조를 모셔 한을 달랬던 사쓰마 지역,
그리고 메이지 유신을 가능케 하여 일본 근대의 문을 열어 오늘날 일본을 만들었던 지역, 이 모두가 과연 우연이었을까?
- 출처 월간개벽 2010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