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자료실
“일본 큐슈는 가야의 分國이었다”
한국 전자 산업의 선구자였던 김향수.
신동아에 기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본의 한국문화 탐방기.
신동아 홈페이지에는 현재 보이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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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큐슈는 가야의 分國이었다”
【 아남그룹 명예회장 김향수의 한일 문화유적 탐방기 】
《현해탄을 가로질러 일본 규슈에 도착했을 때 나는 거기서 가야의 후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의 「천손 강림 신화」는 바로 가야의 선조들을 맞이하는 역사였으며, 지금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찾아가 바로 그들의 신사(神社)에는 가야의 조상신들이 모셔져 있었다. 규슈는 바로 가야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일본 규슈(九州)지방 구마모토(熊本)현 야쓰시로(八代)시에 있는 야쓰시로신사.
「묘견공주」를 제신(祭神)으로 모시는 곳이라 해서 일명 묘견궁(妙見宮)이라고도 부르는 이 신사를 찾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구마모토 공항에 내린 다음 택시로 약 40분 거리에 있는 구마모토역으로 달려가 다시 기차로 갈아타고 야쓰시로역까지 가야 한다. 거기서 또 택시를 잡아타고 동북쪽으로 약 4km 가야 웅장한 묘견궁이 나타난다.
지리적으로 일본 열도 최남단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야쓰시로신사는 한국인이라면 한번쯤 마음먹고 찾아볼 만한 곳이다. 이 신사의 주인공은 묘견공주, 일본어로는 히미 코(卑彌呼)라고 부르는데 그녀가 한반도에서 도래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신사 안에 오롯이 간직돼 있다고 전해 내려오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한일고대사를 다시 써야 할 만큼 충격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일본국가의 기원』을 저술한 일본 사학자 이노우에 마쓰사다(井上光貞)는 묘견공주 히미코는 규슈 일대에서 29개의 소국 5만호(戶)를 평정, 야마대국(일본 최초의 나라)의 여왕이 된 인물로 일본 왕가의 전설적인 시조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라고 밝힌 바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일본 왕가의 조상이자 일본의 건국신인 묘견공주 히미코가 바로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度來人)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 「전설 속의 여왕」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가야의 건국시조이자 나(김해 김씨)의 조상이기도 한 김수로왕의 딸이라는 일부 학자들의 추론이 제기된 후 나는 그녀의 흔적이나마 추적하고 싶었다.
내가 이 전설의 여왕을 만나기 위해 신사를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다. 한국인들은 신사 하면 으레 일본전범의 위패를 안치한 야스쿠니신사를 쉽게 머리에 떠올리지만, 일본 인들에게는 신사는 신앙의 터전이자 생활 그 자체이며 일본역사의 터전이다. 그들은 숭앙해 마지않는 위대한 인물들의 위패를 신사에 모셔놓고 지극한 정성으로 받들어 모신다. 이런 신사는 일본의 마을마다 가장 정숙하고 정결한 곳에 세워져 있으며 마을 사람들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신사를 찾아가 자신들의 소원을 빈다.
그런데 신사, 특히 신사에 봉안된 인물들을 추적하다 보면 의외로 감추어진 역사의 「속살」을 볼 수 있다는 게 오랜 세월 일본을 드나들며 얻은 나의 문화유적 탐사 체험 이다.
나는 야쓰시로신사 탐사에 앞서 히미코에 대한 자료들을 뒤져보았다.
기록에 의하면 히미코는 서기 148년에 태어나 179년에 야마대국(邪馬台國)의 여왕에 올라 69년간 나라를 다스렸고, 99살이던 247년에 사망한 것으로 돼 있다. 특히 중국의 정통 사서인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은 『사람들이 모두 한 여자를 받들어 왕으로 모시니 이름은 비미호(卑彌呼;히미코)였다. 그녀는 귀신의 도(鬼道)를 섬기며 능히 무리를 현혹케 하였다. 나이가 들어서도 지아비 없이 살았으며 남자동생이 옆에서 국사를 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불행히도 히미코가 김수로왕의 딸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기록한 역사책은 없는 듯하다. 다만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비미호(히미코), 일본의 정사인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공왕후(神功王后)와 『고사기』의 난생녀(卵生女),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세오녀(細烏女)와 「김해김씨왕세계」의 신녀(神女) 기록이 히미코의 생존연대와 거의 비슷하다는 점은 이들이 동일인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특히 「김해김씨왕세계」에서는 「위지왜인전」의 기록을 뒷받침하듯, 「신녀」가 남자동생과 함께 어디론가 건너갔음을 묘사하는 구절도 나온다.
『선견(仙見)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자가 신녀와 더불어 구름을 타고 떠나버렸다. 왕(김수로왕의 장남이자 가야국 2대왕인 거등왕)은 강가에 있는 돌섬 바위에 올라가 선견왕 자를 부르는 그림을 새겼다. 그래서 이 바위는 왕의 초선대(招仙臺)라고 전해지고 있다』
비록 「김해김씨왕세계」가 정통 역사서는 아니지만 이 기록은 한일 고대사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의 역사기행에서도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얽힌 이야기를 좀더 풀어보기로 한다.
우리나라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김수로왕과 인도 아유타국에서 건너온 공주 허황옥(許黃玉)은 한반도에서 최초로 국제결혼을 한 인물이다. 두 사람은 슬하에 10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두었다. 장남은 수로왕의 뒤를 이어 2대왕(거등왕)이 되었고, 둘째왕자는 허왕후가 죽은 후 허씨 가문을 잇도록 하기 위해 성을 허씨로 바꾸어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었다(이 때문에 지금도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머지 8명의 왕자 중에서 7왕자는 허황옥의 오라버니, 즉 외삼촌이 되는 보옥선사(寶玉禪師)를 따라 고령에 있는 가야산에 들어가 도를 닦았으며 그후 방장산(지리산)에 들어가 성불(成佛)한 후 승운이거(乘雲離去)했다고 전해진다.
두 공주는 『편년가락국기』에서 한 공주가 신라의 석태자(昔太子)에게 시집갔다고 나타나 있다. 결국 한반도에서 전혀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인물이 나머지 1명의 왕자와 1 명의 공주다. 바로 이들이 선견왕자와 묘견공주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허왕후의 정체를 찾기 위해 일본은 물론 멀리 인도까지 직접 탐사한 뒤 『가락국기』라는 저서를 남긴 작가 이종기씨(작고)도 묘견공주 히미코가 가야 김수로왕의 두 공주 중에서 둘째 공주가 틀림없다고 단정하기도 했다. 과연 그렇게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쌍어문과 구사와는 가야 표식
나는 야쓰시로신사에서 묘견공주의 흔적이 될만한 것은 샅샅이 훑어보기로 했다. 야쓰시로 신사를 소개하는 팸플릿에는 제신(祭神)을 하늘의 중심이 되는 신이라는 뜻의 「 천어중주신(天御中主神)」과 국가가 받들어야 할 신이라는 의미의 「국상입존(國常立尊)」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또 묘견궁 입구에도 「황국 최초의 신사」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는 한마디로 야쓰시로신사의 주인공인 묘견이 일본국가 기원의 중심적 인물임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묘견공주신을 모신 본궁에는 위패만 덜렁 모셔져 있어 다소 실망스러웠다. 사실 일본의 신사는 대부분 신사에 위패만 모셔놓고 있는 게 현실이다.
신사 본궁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동안 나는 언뜻 남대문(정문) 처마 끝에 조각돼 있는 신수(神獸) 기와를 발견했다. 몸체는 거북, 머리는 뱀의 형상을 한 전설 속의 구사와(龜蛇瓦)였다. 더욱이 기와지붕 꼭대기에는 머리는 용의 형상인데 몸체는 물고기로 만든 한 쌍의 조형물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게 아닌가. 틀림없는 쌍어(雙魚) 문양이었다. 나는 이것들을 보고 한동안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런 모양이 이역만리 먼 곳, 그것도 남의 나라 땅에 새겨져 있을 수 있는가.
안내판에는 이 신사가 1186년에 지어졌다고 기록돼 있다. 한반도에서는 고려왕조가 들어섰던 무렵인데, 왜 이 신사의 건축가들은 다른 신사들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상징물들을 만들었을까. 그것도 아주 세련된 형태로 보아 매우 정성들였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말이다. 당시의 조각가들이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고유한 상징물들을 그대로 재현했는지, 아니면 조각가들 역시 한반도에서 도래한 가야의 후손들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런 문양을 만들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분명한 것은 이것들이 한반도의 옛 가야국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상징들이란 점이다. 거북은 가야의 건국신화에 중요하게 등장하듯 가야를 상징하는 동물이요, 쌍어문양은 한반도에서는 가야왕조에서만 나타나는 왕가의 문양이다. 지금도 김수로왕릉 경내 문틀 위에는 신어상(神魚像) 한 쌍이 서로 마주보게 새겨져 있다. 결국 묘견궁에서 발견되는 구사와와 쌍어문양은 묘견공주가 바로 한반도의 김수로왕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을 맺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결정적 증거인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인들도 묘견공주가 어디에서부턴가 배를 타고 야쓰시로에 당도했는데, 그 해로(海路)가 아마쿠사제도(天草諸島)의 묘견포였다고 말하고 있다. 또 야쓰시 로 현지 주민들은 매년 11월22일부터 이틀간 거행되는 묘견제(妙見祭)를 규슈지역 3대 마쓰리(일본인들의 축제)로 삼을 만큼 묘견공주에 대한 숭경심을 나타내고 있다.
마쓰리 때는 묘견공주의 야쓰시로 당도를 재현해 커다랗게 만든 구사(龜蛇)를 어깨에 메고 시가행진을 하는가 하면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줄다리기 등 각종 민속행사를 벌이기도 한다.
묘견궁을 둘러본 후 나는 5백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시라기야마(白木山: 일명 영부산(靈符山)) 기슭의 영부신사를 찾았다. 묘견궁의 말사이기도 한 영부신사는 그 전신이 「진구지(神宮寺)」로 원래 묘견궁 동쪽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는데 소실되었고, 그후 795년(桓武天皇 14년)에 다시 조성돼 8백여년간 존속하다가 1600년대 초 또다시 소실 돼 현재의 자리에 옮겼다고 기록돼 있다.
시라기야마를 영부산이라 부르는 것도 이유가 있다. 이 산에 영부신사를 지으면서 묘견궁에 보존하고 있던 태상신선진택영부존상(太上神仙鎭宅靈符尊像; 약칭 태상존상)이 라는 신체(神體) 조각상과 태상비법진택영부(太上秘法鎭宅靈符)라는 부적 목판본 1점을 옮겨오면서 산 이름도 자연스럽게 「영부」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
천년의 신비를 담은 부적
돌계단을 밟고 산기슭에 자리잡은 영부신사에 올랐다. 그러나 막상 신사에 도착해보니 그 중요성에 비해 신사는 규모가 무척 왜소하고 초라했다. 나는 신당에 보존중인 태상 존상과 태상영부를 보고 싶었으나 신사를 지키는 관리인도 사무소도 없었고, 신당문은 커다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을 뿐이었다. 신당문은 1년에 단 한 차례, 그것도 일정치 않은 날에 열린다는 것을 마을주민에게 들었다. 내 마음은 초조했다. 어쩌면 영부를 통해서 묘견공주와 가야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날아가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궁리 끝에 야쓰시로시 공무원을 찾아가 부적을 구해볼 수 있는지를 문의했다. 그 공무원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이곳저곳에 연락해보고 수소문하더니 금판(金版) 영부 탁본 복사지 1매를 구해주었고, 목판 영부를 간직하고 있는 일본인 향토사학자까지 연결해주었다. 처음 보는 외국인에게 성심성의를 다하는 일본 공무원들의 친절함에 고마 움과 함께 부러움을 느꼈다. 이런 자세가 바로 오늘의 경제대국을 이룬 원동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목판 진본을 가지고 있다는 향토사학자를 찾아갔다. 이름을 시라기(白木)라고 밝힌 그 소장자는 수십대 선조때부터 가보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라면서, 낡은 가죽가방에 든 목판 영부를 신주 모시듯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빨강, 파랑 등 오색 천으로 된 보자기를 하나하나 풀자 신비의 목판 영부가 나타났다. 네 등분된 목판을 방바닥에 놓으니, 천년의 신비를 갖춘 자태가 황홀하기까지 했다. 목판 탁본을 수백 번 뜬 탓인지 목판은 먹물이 배 전체가 검은색이었으나 보존상태는 무척 양호했다. 시라기씨는 『진택영부 는 원래 목판, 동판, 그리고 그것들의 탁본 인쇄물 세 종류가 있는데 동판은 소실됐고 목판 원본은 영부사 신전에 보관중이며 조상대대로 내려온 이 목판 소장품도 거의 비슷 한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목판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부적의 한 중앙에는 태상존상 조각상과 똑같은 인물이 그려져 있고, 주위에는 당초화(唐草花)와 묘견궁 기와에서 발견되는 구사(龜蛇) 그림이 매우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또 존상 위에는 우리나라 태극기에서 볼 수 있는 8괘 도형이 원형으로 배열돼 있는데, 원 안에는 북두칠성이 마치 태극기에서 빨강(양)과 파랑 (음)을 곡선으로 가르듯 배치돼 있었다.
어찌 보면 태극기의 옛날 모양이 바로 이것이 아니었나 착각할 정도였다. 한민족의 상징으로서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발견되는 북두칠성과 태극문양은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태상존상과 8괘 주위에는 중국 한나라 효문제(孝文帝)가 유진평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전수받아 널리 퍼뜨려 나라를 평안케 했다고 전해지는 72도(七十二道)가 가지런히 배열돼 있었다. 한마디로 매우 진귀한 부적이었다. 나는 이 부적을 보면서 역사 추리를 해보았다.
「신상과 부적에 동시에 등장하는 태상(太上)신선 혹은 태상왕은 왕위를 다음 임금에게 물려준 임금을 지칭하는 말이다. 보통은 줄여서 태왕(太王) 또는 상왕(上王)이라고 한다. 그런데 김수로왕은 만년에 태자 거등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방장산에 별궁을 지어 허왕후와 함께 살았다. 그리고 이 별궁을 태왕궁이라 하고 스스로는 태상왕이 되었다.
후일에 세운 김수로왕릉의 신도비문에도 태왕원군(太王元君)이란 존호로 표기돼 있는데, 이 태상비법진택영부의 「태상」이란 글자와도 일치하고 있어 이의 가능성을 더욱 높여준다.
더욱이 부적 하단에는 이 부적의 출처로 대화국(大和國) 당시 타락산(陀洛山)이라고 한 점은 의미 심장하다. 이는 허왕후의 모국인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의 「타」자와 수 로왕 가락국(駕洛國)의 「락」자에서 따온 명칭일 가능성이 높다. 예로부터 부적 등에 쓰는 산의 명칭은 존재하는 산 이름이 아닌 어떤 상징이 되는 이름을 쓰는 것이 일반적 이기 때문이다(실제로 나는 대화(야마토)국 당시 옛날 고지도를 어렵게 구해 확인해보았는데도 타락산은 존재하지 않았다).
신존상 밑에 그려져 있는 구사도(龜蛇圖) 역시 예사롭지 않다. 이는 곧 가야의 상징인 거북이요, 수로왕의 딸로 추정되는 묘견공주 히미코가 야쓰시로에 당도할 때 타고 왔다는 전설의 구사와도 일치하지 않는가. 결국 이 모두가 가야문화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나는 시라기씨의 도움을 받아 목판영부의 유래가 적힌 연기집설(緣起集說)을 해독해보았다.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태상비법진택영부의 신은 백제 성명왕의 제3왕자인 임성태자가 히고국(현 구마모토현)의 야쓰시로에 조정을 옮겨올 무렵 재앙을 막아주는 수호신으로 삼았으며, 압죽원진 (지명;현재 묘견궁 서측문 앞 공터) 진구지에도 진좌(鎭座)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후 740년 영부가 목판으로 제작되었고, 야쓰시로 진구지로부터 전국에 널리 퍼뜨리게 하였다.
그 수법(修法;수도하는 법)은 궁중에까지도 전해졌다고 기록됐다. 오랜 세월이 흘러 1361년 6월1일 어떻게 된 연고인지 야쓰시로 고한촌(古閑村)에서 금판 영부가 발견돼 진구지 신고(神庫)에 봉해져 세상에 널리 퍼졌다… 그러나 명치유신이 한창이던 1872년 신불(神佛) 분리의 위난으로 전통적인 진구지는 황폐해졌고 진택영부 수법 및 영부 반포도 끊어진 채 내려왔다.
상고(上古) 나라(奈良) 조정에 의해 대대로 궁중에 전해져 국가와 만민을 보호하고 재난을 없애며 복을 부르는 영부 수법의 전통적 신앙을 계승하여 부흥하고 신덕(神德)과 신의 도우심을 찬송하기 위해 1973년 진구지를 부활, 영부당(영부신사)을 재건 수호하였으며 72도의 진택영부존상을 다시 만들고 목판을 재판하여 독실하게 신앙하는 가정 에 널리 퍼뜨리게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신자들은 영부의 신앙수법을 행하고 제재초신(除災招神)을 함께 누리는 것을 염원하였다고 한다』
나는 사학자는 아니지만 이 내용이 역사학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최소한 영부에 그려져 있는 신이 백제 성명왕 이전부터 존재해왔고 받들어졌다는 점, 이미 그 당시 백제세력이 일본까지 진출했다는 점 그리고 영부 수법은 부적을 매개체로 한 일종의 신앙체계로 귀족사회까지 널리 퍼졌다는 점 등은 연구해볼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더욱이 영부신앙은 바로 중국사서에 나오는 비미호(히미코)가 「귀도(鬼道)를 섬겼다」는 것과 일치하는 맥락이 아닌가. 부적의 소유주이자 향토사학자인 시라기씨는 부적 에 나오는 신존상이 묘견공주일 것이라고도 말했다. 나는 시라기씨가 내게 베풀어준 정성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집을 나섰다.
일본에 상륙한 가야의 무리들
나는 다음 여정으로 야쓰시로시를 흐르는 구마천(球磨川) 센가와교 바로 옆에 세워진 하동도래비(河童渡來碑)를 찾았다. 화강암에 새겨진 비문에는 『지금으로부터 1천수백 년전 3천여명의 하동(河童)이 이곳에 와서 바위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축제를 베풀었다. 이 축제가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오레오레데--라이타』(オレオレテ--ライタ)이다」 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이 비문을 읽어보면서 매우 흐뭇함을 느꼈다. 일본인들은 알 수 없을 것이다. 「오레오레데--라이타」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그러나 한국사람들 특히 영남지역 사람 들은 이것을 읽으면 금방 무슨 말인지 안다. 「오래 오래 되었다」라는 영남지방 사투리이기 때문이다.
또 일본인들은 「하동」에 대해서도 억지 해석을 덧붙이고 있었다. 중국 구천방(九千坊)의 하동 집단이 양자강 하구로부터 황해로 나와 일본까지 헤엄쳐 와 결국 구마모토현 야쓰시로에 상륙했다는 것. 또 하동의 조각상도 만들어 놓았는데 얼굴은 원숭이 얼굴에 코와 입은 돼지처럼 만들어 놓았다. 게다가 하동이 중국에서 일본까지 헤엄쳐왔다는 것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는 오리발처럼 물갈퀴를 만들어놓기도 했다.
그런데 「하동」은 원래 「가라(가야)에서 온 무리」를 뜻하는 말이다. 하동을 일본어로는 「갓파(かっぱ」라고 하고 야쓰시로 주민들은 옛날부터 「가라파」라고 불러왔다. 다시 말해 하동의 원말은 「가라배(加羅輩)」라는 뜻이다. 또 야쓰시로시와 얼마 멀지 않은 북규슈 동서부지역 일대는 7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가라」라고 불렸다. 결국 하 동도래비는 「가야인들이 이곳에 온 지 오래오래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이 벌였던 축제는 수천 명의 가야 도래인과 함께 야쓰시로에 나타난 묘견공주 히미코가 구마천변에서 매년 그들의 도래기념축제를 벌였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일본에 있는 한국의 문화유적을 살펴보면서 일본인들이 얼마나 한국혼이 깃들인 문화유적을 인멸하고 또 왜곡시키려하는지를 무수히 보았다. 하동도래비 역시 이같은 시각에서 비롯된 일본인들의 역사왜곡이라고밖에 달리 볼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인들의 장난을 한가지 더 들어보자. 나는 예전에 가고시마현의 도미구마(富隅)성 근처에서 묘견공주를 모시는 히미코신사(卑彌呼神社)를 보고 기억해둔 적이 있다. 그러다 몇 해가 지나 다시 그곳을 찾아가보니 어느새 히미코신사라는 간판은 사라져버리고 전혀 그 뜻을 알 수 없는 「히루코신사(蛭兒神社)」라고 변조돼 있었다. 일본인들은 바로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한국과 관계가 있는 유적은 교묘하게 인멸하거나 왜곡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일본인들은 도래계 한국인들이 그들의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는 신사를 대상으로 이같은 인멸작업을 자행하고 있다. 이는 일종의 거부감 때문일 것이다. 내가 특히 한국과 관련된 신사를 자주 찾아다니는 것은 날이 갈수록 도를 더하고 있는 신사 왜곡을 막고 우리문화의 숨결을 지키기 위해서다.
나는 유유히 흐르는 구마천을 바라보면서 묘견공주 히미코가 전설의 「구사」, 즉 거북을 타고 왔다는 것이 거북모양을 본떠 만든 배를 타고 오지 않았나 상상해본다. 이는 수로왕이 강림한 김해시 구산동의 구지봉(龜旨峯) 전설과도 연결되는 중요한 대목이다.
실제 일제는 우리 한반도를 강점하고 있을 때인 1915년 치안을 이유로 조선총독부 극비지령인 「경무령」을 발동해 김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김해김씨족보 발행을 금지했었 다. 지난 91년 한일협력교류기금 모금을 위한 제18회 한일문화강좌에 참석한 재일 사학자 박병식씨는 강연에서 『이 조치는 히미코가 다스린 야마대국의 정체는 물론 김수로왕 왕족들이 고대일본의 왕가를 이루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탄로날 것이 두려워 취한 조치』라고 밝힌 바 있다.
소시모리에 얽힌 역사의 향기
나는 하동도래비를 둘러보고 다음날 가고시마현 아이라군 묘견 온천마을 산중턱에 있는 웅습(熊襲)굴, 즉 「구마소」를 둘러보았다. 관광지라서 그런지 평일인데도 관광객들이 제법 보였다. 그 옛날 원주족들과 가야 도래인들의 다툼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나는 30여평 크기의 동굴 속을 거니는 동안 문득 보통학교 시절 나의 은사를 머리에 떠올렸다.
「웅습」이라는 말은 일본어로 「곰의 습격」을 뜻하는데, 이는 9척 장신에 힘이 센 한반도 도래인을 곰에 비유하는 의미가 있다고 스승으로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일본의 핵심각료이자 스승의 작은 아버지가 『일본의 초대 진무(神武)왕도 한반도에서 건너온 「구마소」였다』라고 말했던 것을 분명히 기억해낼 수 있었다. 말하자면 「웅습」의 일본 발음인 구마소는 가야에서 온 도래인이라는 뜻인 것이다.
사실 내가 한일고대 역사에 눈을 뜨게 된 것은 나의 은사 덕분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왜정 치하에서 보통학교를 다닐 무렵 닷다 기요토(立田淸人)라는 마흔이 넘은 독신 교사가 있었는데, 나는 그 은사를 무척 따랐고 스승도 나에게 무척 깊은 애정을 쏟아주었다. 어느날 은사는 『너희들 말 안들으면 어머니의 나라 소시모리(曾戶茂梨)로 보내버릴거야!』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어린 나로서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성장하면서 두고두고 뇌리에 남아 있었고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그러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 주경야독하고 있을 무렵이다. 동네 아이들이 장난을 치면서 노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아이들이 닷다 스승이 들려주었던 소시모리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어머니의 나라 소시모리…」, 과연 어머니의 나라가 어디란 말인가. 이 의문은 결국 수십년이 지난 후 닷다 스승을 다 시 만나서야 풀렸다.
일본이 벌이고 있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이미 반백이 넘은 은사 부부는 나를 반갑게 맞이했고, 또 당시 일본의 핵심관료이던 은사의 작은아버지까지 소개해주었다. 가족들과 내가 합석한 가운데 두 분은 고대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 언급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나는 비로소 보통학교 5학년 때 들었던 소시모리의 의미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어머니의 나라 소시모리란 바로 한반도를 지칭하며, 소시모리는 소머리(牛頭峯)의 일본식 발음(취음)이며, 예로부터 일본사회에서는 속담처럼 널리 사용되고 있다고도 했다. 당시 닷다선생은 소시모리를 강진(필자의 고향)의 소머리봉(우두봉)에 비유해 「말 안들으면 너희 고향에 보내버린다」고 재미있게 표현하신 것이다.
실제로 소머리봉은 한반도내에 강진의 우두봉을 비롯해 옛날 가야강역이었던 고령의 가야산(옛날 명칭은 소머리봉), 춘천의 우두산 등 여러 곳이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말하 는 소시모리가 고령의 가야산이라는 견해와 춘천의 우두산이라는 견해도 있어서 지금까지 분명치 않았다. 그러다가 나는 얼마 전 춘천의 우두산에 일제시대 때 조그마한 신사가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며칠 후 그곳을 현지답사했다.
호반의 도시 춘천은 과연 경관이 수려하고 산자수명(山紫水明)해 신(神)의 정기가 서릴 만한 곳이었다. 옛날 소시모리라 칭했던 우두산(牛頭山)은 시가지의 변두리 마을 「우 두동」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나는 우두산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틀림없이 소대가리를 닮은 데다가 바로 옆으로 휘돌아 흐르는 소양강이 일본 센다이(川內)시의 카미카메야마(神龜山)와 너무나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카미카메야마는 김수 로왕의 후손이자 일본 신대(神代)의 왕으로 추앙받아온 니니기노미코토(爾邇藝命)의 능묘가 있는 신체산(神體山)이다. 그 크기나 모양, 옆으로 흐르는 강 등이 너무나 흡사 했는데 일제시대에는 이곳 우두산 정상에 스사노오를 제신으로 모시는 신사가 있었다고 현지 주민은 증언했다.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우두산이 「한반도의 소시모리」에서 외면당했던 주된 이유는 「춘천은 가야의 강역이 아니다」라는 일반적인 관념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관념은 잘못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되었다. 우두산 인근 소양강변에서 가야의 땅이었음을 증명해주는 마을 「가라목(加羅頂)」을 발견했던 것이다.
예부터 마을 명칭으로 이렇게 불려 오는 이 마을은 향토사 자료에서 확인해본 바 가라목 또는 가래울로 표기되어 있었으며 한자로는 가야의 정상이라는 뜻인 「加羅頂」으로 나타나 있었다. 매우 중대한 발견을 한 듯 흥분을 감출 길 없었다.
이같은 사실을 한반도가 일제에 의해 강점당하고 있던 1936년 9월에 발행된 한국지리 풍속지 총서 54권인 춘천풍토기(春川風土記), 강원도 도세 요람에서도 최종확인되었다. 결국 그들이 말하는 소시모리는 6가야의 북단 강역이었던 춘천의 우두산을 지칭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어쨌든 나는 은사 덕분에 일본의 고대문화 유적에 깊은 관심을 가진 이후 사업이 바쁜 중에도 일본에 들를 때에는 꼭 우리 조상의 얼이 담긴 문화유적을 답사하곤 했다. 특히 규슈지방의 가야유적 답사에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은 가야 김수로왕의 후손들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 건국의 뿌리가 되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이것은 당시의 인구이동으로도 확인해볼 수 있다. 동북아시아에서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이 정립하고 가야가 건국할 1세기에 일본열도는 「야요이(彌生)」 시대였다. 야요는 갓난아이가 탄생했다는 뜻의 미개시대를 말하는데, 이 당시 규슈인구는 6천여명에 불과했고, 일본 전역을 통틀어도 원주족으로 26만여명의 아이누족만이 살고 있었다.
그러던 규슈 인구가 3세기에는 급작스레 60여만명을 넘어섰다. 불과 2백년 사이에 인구가 1백배가 넘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구 증가로 보기에는 불가능하다. 정상적인 인구증가는 1대를 20년으로 칠 때 자연감소분을 전혀 계산하지 않더라도 약 5만명 수준이 고작이다. 결국 60여만명이라는 인구는 외부에서 유입한 경우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 당시 한반도는 어떠했을까. 고구려,백제, 신라와 호각지세였던 한반도의 가야는 왕성한 철기문화로 국력을 신장해나갔지만 김수로왕 사후 국세가 급격히 쇠락해 탈출구를 모색하게 된다. 가야가 일찍부터 발달한 해상무역의 이점을 이용해 거리가 가장 가까운 규슈로 진출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 즉 백제와 신라의 협공이 계속되는 가운데 가야는 대가야를 중심으로 명맥만 유지한 채 6가야 연맹의 주류는 규슈로 진출했으며, 그 정점에는 김수로왕의 후손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일본건국신화의 주인공들
이런 점에서 김수로왕의 후손들 중 7왕자는 무척 신비에 싸여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7왕자들은 외삼촌을 따라 산속에 들어간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7왕자는 앞에서 살펴본 묘견공주 히미코처럼 수로왕의 자손들이다. 그런데 그 7왕자의 흔적이 바로 규슈일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또 7왕자 유적이 발견되는 곳에서는 으레 묘견공주를 기념하는 유적 및 신사가 있어 이들 형제가 매우 가까운 곳에서 활약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묘견공주가 선견왕자와 함께 일본으로 도항한 이후 나머지 왕자들도 후에 합류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의 저명한 사학자인 아라타 에이세이(荒田營誠)도 구름을 타고 떠났다(乘雲離去)는 7왕자가 현해탄을 건너 일본 규슈에 도착, 일본 신대(神代)의 건국 주역이 되었다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논문 때문에 그는 우익분자들의 테러 협박을 받고는 지금도 숨어지내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이 말하는 신대, 즉 「신의 시대」에 활동했던 무대로 가보자. 규슈 남쪽 미야자키(宮崎)현에 자리잡은 쿠지후루다케(久士布流多氣=龜旨峯, 또는 다카치호미네, 1574m) 와 바로 인근의 가라쿠니다케(韓國岳, 1700m)는 이름만 들어도 우리나라와 직접적 연관이 있음을 보여주는 산이다. 쿠지후루다케는 김수로왕의 강림장소인 경남 김해의 구지촌봉(龜旨村峯)과 똑같은 말이고, 가라쿠니다케의 가라쿠니는 「가락국」의 일본어 발음인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인들은 한국악의 「한」(가라;から) 자가 마음에 걸렸는지 명치유신 때 같은 발음이 나는 「공(空)」(역시 발음은 가라)자를 써 「空國岳」으로 개명하려 했으나, 지방 주민들의 강한 반발과 외면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런데 일본 최고(最古)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와 『고사기』에는 두 산을 배경으로 「천손강림(天孫降臨)」신화, 즉 일본건국의 시조 신화를 등장시키고 있다. 『고사기』에는 일본의 초대왕인 진무(神武)천왕의 증조부이자 가야국 7왕자의 화신(化神)으로 표현되는 니니기노미코토가 쿠지후루다케에 강림하여 제전의식을 올린 후 인근 가라쿠니다 케로 올라가 북쪽의 한반도를 바라보며 『여기는 좋은 곳이다. 왜냐하면 가라쿠니(가야; 한국)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조칙을 남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니니기노미코토의 조국이 가라쿠니, 즉 가락국임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일본 동경대 명예교수이자 동대학 오리엔트 박물관장인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는 지난 91년 김해 대성동의 가야고분 유물 등을 확인하고 귀국한 뒤 월간 「아사히」를 통해 『김해 구지봉에서 시작되는 가야의 건국신화와 구지봉과 동일한 의미의 규슈 쿠지후루다케의 일본 건국신화에서 도저히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일치된 점을 일찍이 발견했던 미시나 아키히데씨의 설에 동의한다』는 요지로 장문의 글을 발표한 바 있다.
그는 기고문에서 지명뿐 아니라 가야의 김수로왕은 붉은 보자기(紅布)에 싸여 내려왔는데, 일본은 「마코토오후스마」라는 이불 비슷한 보자기에 쌓여 내려왔다는 등 두 나라의 건국신화가 강림장소와 방법, 도구에서 어떻게 이렇게 일치할 수 있는가 하고 놀라워했다.
그는 더 나아가 가야인들의 규슈 이주와 니니기노미코토의 등장, 그의 증손자인 진무(神武)가 규슈에서 동정(東征)을 시작하여 야마토(大和)를 평정한 뒤 일본의 초대 왕이 되었다고 발표함으로써 일본 사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던져 주었다. 일본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에가미교수의 글에 대해 아직까지 일본내에서 어떠한 반론을 제기하는 학자는 나오지 않고 있다. 이는 가야신화의 주인공이 일본건국신화의 주인공이라는 주장이 고고학적 유물의 발견에 힘입어 신빙성을 더하고 있음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없어진 7왕자를 만나다
가야의 7왕자를 대표하는 니니기노미코토 일행은 이후 이 산을 중심으로 남쪽 가고시마(鹿兒島)현 일대에 살고 있던 선주족들을 서서히 동화 흡수하여 세력을 넓혀갔다. 니니기노미코토 일행이 최초로 궁궐을 짓고 후손들을 낳아 길렀던 궁터를 찾아보기로 했다.
가고시마현 남서부의 가세다(加世田)시에서 바닷가 쪽(서쪽)으로 6km쯤 가다 보면 길가에 「일본 발상의 땅」이라고 쓴 높이 1m 정도의 대리석 표석이 있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1백m쯤 떨어진 산 언저리에 바로 가사사 궁궐터가 있다.
이곳에서 만난 80대의 촌로(村老)도 이 궁궐터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2천년전에 쌓은 석축 일부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리고 궁궐터를 기념하는 비석 옆에는 마치 보 트처럼 생긴, 안쪽이 파인 두 개의 주춧돌이 천년의 고독을 음미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곳을 소개하는 석조 비문을 읽어보았다.
『천손 니니기노미코토가 다카치호미네(쿠지후루다케)에 내려와서 코노하나사쿠야히메를 아내로 맞아 황실의 거처로 정한 곳이다. 화조명, 화수세리, 히코호테미노미코토 세 왕자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우리들은 이곳 옛 선조들의 유적을 마음속에 기리고 새기는 뜻으로 신화 일본발상의 땅에 이 비석을 건립한다』
이처럼 니니기노미코토의 궁궐터를 일본 발상의 땅이라 하여 일본인들이 그 의미를 크게 부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신대의 존재가치가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알 수 있다.
한편 가고시마 일대에서는 일곱 왕자를 지칭하는 7자가 들어가는 유적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었다. 7왕자의 맏형인 니니기노미코토를 제신으로 모시는 기리시마신궁 인근에서 택시기사의 도움으로 나나야시로신사(七社神社)를 발견했다. 이 신사의 주인공이 가야의 7왕자라는 것은 신사 입구에 놓인 거북돌(龜石)을 통해서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일본의 신사 혹은 유적지에서 거북돌이 놓여 있으면 「아, 이곳은 가야의 조상들을 모시는 곳이구나」 하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또 아이라군 일대에는 7왕자가 외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7개의 성터가 있었다. 나는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보존돼 있는 도미구마성(富隅城)을 올라가보았다. 성 북쪽 으로 바라보면 멀리 총사령부에 해당하는 구마소성(熊襲城)이 있고(고쿠부시 성산공원 바로 아래에 있는데 현재 흔적만 조금 남아 있다), 성 앞으로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바다가 보였다.
이곳 토박이인 택시기사는 옛날에는 도미구마성 바로 앞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말했다. 지금은 바다를 메워 간척을 해놓았는데 아마도 7왕자들은 각기 성을 하나씩 맡아 외세의 침략을 방어했을 것이다.
한편 쿠지후루다케(龜旨峯)에서 발원하여 고쿠부(國分) 들녘을 흐르는 아모리가와(天降川;하늘에서 흐르는 강) 하구에는 7왕자들이 항구로 삼았다고 전하는 나나미나토( 七港)가 있으며 가고시마현과 인접한 구마모토에도 7왕자들이 축성했다고 전해지는 시치죠(七城)가 현존하고 있음도 확인했다.
일본의 양식 있는 학자들, 특히 아라타 에이세이씨는 『니니기노미코토가 신(神) 1대이며, 신 2대는 그의 아들인 히코호데미노미코토이며 3대는 우가야후키아에즈노미코 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견해로는 이들 신이 모두 7왕자들을 지칭하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것은 수십년간 일본 유적들을 살펴본 나의 판단이기도 하다.
현재 신 1대인 니니기의 능묘는 가고시마현 서북쪽 센타이(川內)시 들녘에 자리잡고 있는 카미카메야마(神龜山) 정상의 에노산릉이다. 그런데 이 산릉은 신기하게도 김해의 구지봉과 춘천의 우두산과 크기나 모양, 환경 조건이 너무 흡사하다는 것을 앞에서 밝힌 바와 같다. 니니기는 옛 조상의 나라를 잊지 못해 자신의 무덤자리로 조국과 빼닮은 산을 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념에 잠겨보기도 했다.
신 2대인 히코호데미노미코토의 다카야산릉은 쿠지후루다케 남쪽 자락에, 그리고 신 3대 우가야 산릉은 가고시마 동쪽 오스미반도의 중심부인 우토야마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특히 이 세 곳의 산릉은 그 절경이 가위 천하제일을 자랑하는 곳이다.
그런데 신 2대가 있는 다카야 산릉은 안타까운 일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몇해 전 이 산릉을 발굴하려던 일본 궁내청에서는 갑자기 작업을 중단하고 흙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궁내청의 공식 발표는 「신대 천황의 존엄성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사실은 가야의 유물이 대량 매장돼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규슈지방에서 마지막으로 단군신앙과 관련된 신사를 가보기로 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환웅과 단군을 모시고 있다는 환단신사(桓檀神社)를 찾아내는 데는 적지않이 애를 먹었다. 환단신사가 가고시마현에 있다는 말만 듣고 이곳저곳 수소문해 보았으나 신사목록에 등재돼 있지도 않을 뿐더러 우리민족의 건국시조를 모시는 곳이라 그런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구시키노(串木野)시에서 동남쪽으로 약 4km 떨어진 미야마(美山) 마을 심수관씨의 「수관 도원」(조선에서 끌려간 조선도공 심당길의 후예가 사는 도원)에 들른 길에 60대 촌로로부터 환단신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는 신사 부근에 산마우다케(三舞岳)라는 자연석 바위가 있는데 단군의 후손들인 한국계들이 그 바위 위에 올라가 눈물을 흘리며 고향을 그리워했다는 얘기를 은 적이 있 다고 했다. 나는 곧바로 찾아나섰다. 한적한 농로와 시골마을을 지나 1km쯤 가다보니 무척 넓은 차밭이 나타났고 차밭 건너편에 「옥산(玉山)신사」라고 쓰인 간판이 있었다. 여기가 바로 환단신사였다.
그러나 찾았다는 흐뭇함도 잠시, 허술하고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에 착잡한 마음이 이를 데 없었다. 신사를 관리하는 사무소는 물론 참배객 한 사람도 없는, 그야말로 버려진 곳이었다. 신사 본전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퇴색해 목판화가 먼지에 싸인 채 나뒹굴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환웅과 웅녀를 그린 듯한 천상계(天上界) 그림이었다. 가에이(嘉永)라고 쓰인 연호가 희미하게 보이는 것으로 보아 명치유신 이전에 만들어진 것 같았으나 언제부터 버려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신사 처마의 곧은 선과 지붕 꼭대기의 골기와는 한국과 동일한 건축양식이었고 사각으로 깎아 세운 기둥과 서까래 그리고 창틀 모두가 소나무로 돼 있었다. 경내도 일본식이라기보다는 한국적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과거에는 이 신사도 환단신궁(桓檀神宮)이라는 이름으로 사격(社格)이 높았으나 명치유신 때 현재의 이름으로 격하되 었다. 신전에는 조선시대에 쓴 순 한글소설인 『숙향전』이 단군위패와 함께 모셔져 있었다고 하나 자물쇠로 굳게 닫혀 있어 볼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을 누를 수 없었다.
단군신앙의 또 다른 메카로는 히코산신궁(英彦山神宮)이 있다. 이 신사는 북규슈지방 후쿠오카(福岡)현과 오이타(大分)현 경계에 위치한 히코산(1200m)에 자리잡고 있다. 이 신궁에 모셔진 제신이 바로 우리 건국시조인 단군과 단군의 아버지인 환웅이다. 또 히코산신궁 봉폐전 남쪽에 위치한 다마야신사, 일명 수험굴(修驗窟)에는 어깨를 덮을 만큼 긴 머리칼과 수염 그리고 도복을 차려입고 근엄하게 앉아 있는 환웅영정이 모셔져 있는데, 누가 보더라도 첫눈에 환웅의 수험도(일명 天驗道)임을 알 수 있어 한국방 문객들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한편 히코산 정상의 삼봉(三峯;북악, 중악, 남악) 중에서 가운데에 있는 중악의 정상에는 한반도를 향해 북향으로 안치해놓은 상궁(上宮)이 있는데, 일본 초대천황인 진무가 동정을 할 때 제사지냈다는 전설에 따라 서기 740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이 히코산신궁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온 벳푸대 나카노반노(中野幡能)교수는 『이 신앙은 분명히 한국의 단군신앙에서 유래한 것이며, 이 삼악의 신령들은 한국의 백두산 신, 즉 환인과 환웅과 단군의 삼신』이라고 주장해 일본 사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도 있다. 이 환웅의 수험도가 전성기 때인 6세기에는 수도하는 수험도사(修驗道士)가 무려 규슈 인구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40여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신앙에 대한 숭앙심과 우리 민족의 규모가 어떠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오늘날에도 이 지방 주민들은 수험도를 신봉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처럼 마늘을 간장에 절인 마늘장아찌를 먹거나 선물로 주는 풍습이 전해져 내려온다. 이는 환웅이 마늘을 먹고 21일간 수도한 끝에 사람으로 인정받은 웅녀(熊女)신화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규슈에 있는 한국과 관련된 유적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히코산신궁도 오래 전부터 일본의 황국사관 정립정책에 의해 수난과 박해를 받아왔다. 19세기 초 명치정부는 수험도 금지령을 내린 후 히코산신궁은 물론 히코산 자체를 폐쇄하는 극악한 탄압을 강행했다. 그런 까닭인지 현재 일본에 살고 있는 한반도 도래인의 후손들조차도 환웅이나 단군의 역사적 존재를 모르고 있다. 환웅영정을 선정상인(善正上人;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위에 있다)이라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이름으로 붙여놓고 있을 뿐이었다.
조선조 임진왜란 때 붙잡혀온 조선 도공의 후예인 제15대 심수관씨는 『규슈에서 다다미방을 빼고는 모두가 한국인 것』이라는 말을 스스럼없어 털어놓는다. 실제로 그렇다. 고대 규슈는 가야의 분국이나 다름없었으며, 일본 신대(神代)와 진무천황 이후의 인대(人代)의 초기 왕들 역시 가야의 후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이룩한 문화와 역사는 고대한국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호에는 야마토 평원과 백제진출 유적을 살펴보기로 한다.
<정리 안영배 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