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5 - 대한사랑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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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요서를 침략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다스린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했다.”고 나온다.
북위와 백제가 전쟁을 했다는 이 기사는 『자치통감』에서 남제의 역사를 전한
〈제기齊紀〉의 영명(永明) 6년에 나온다. 영명 6년은 서기 488년으로 백제의 동성왕
재위 10년에 해당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편에는 “재위 10년에 위
나라가 군사를 보내서 백제를 공격했으나 백제에 패하였다.”고 같은 사건을 기
록한 기사가 나온다. 『송서』에 백제가 요서지역을 차지했다는 기록에 비추어 볼
때, 위나라(북위)가 백제를 공격했다는 『자치통감』과 『삼국사기』의 기록은 바다
건너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에 있던 백제 땅을 공격한 것으로 봐야 한다. 북위는
유목민 선비족이 세운 나라로서 해전(海戰)의 경험이 없는 나라이므로 바다를 건
너 한반도에 있는 백제를 침공해 왔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해석이다.
『양서』 백제전에도 “그 나라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晉나라 때 고구려는 이미 요동을 침략하여 차지하였고,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
2군의 땅에 웅거해 있었다. (백제는)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했다.”고 나온다. 백제
가 진나라 이전에 이미 요서군과 진평군 2개군을 다스리고 있었고 이것을 스스
로 백제군이라고 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두우(杜佑, 735~812)가 편찬한 『통전』
백제조에서도 “진나라 때에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침략하여 차지하고 있었는데,
백제도 요서‧진평 두 군에 웅거하였다.”고 하였다.
이처럼 고구려와 백제가 대륙을 지배하였다는 사실이 중국의 여러 사서들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을 기록한 사가들이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말한다. 요서군과 진평군은 백제가 대륙 북부의 가장 대표적인 거점이었으며, 강
남에서는 절강성에까지 이르렀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는 이에 대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보다 먼저 고구려는 백제와 밖에서 서로 경쟁하며 공존하였다. 요서 땅에 백
제의 영지가 있었는데 곧 요서‧진평이고, 강남에는 월주가 있었으니 속현으로 산
음, 산월, 좌월이 있었다. 명치 11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쳐서 취하고 군현의 이
름을 바꾸어 송강‧회계‧오성‧좌월‧산월‧천주라 하였다. 명치 12년에 신라 백성을
천주로 옮겨 그곳을 채웠다. 이 해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아니하므로 군대를 보
내어 요서‧진평의 군을 쳐서 빼앗으니 백제군이 없어지고 말았다.
요서‧진평에 있던 백제군이 없어진 때는 다른 문헌에서는 나오지 않으나 『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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