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6 - 월간 대한사랑_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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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고 된장도 있고 쌈장 등 없는 게 없는 거예요. 난 그게 너무 반가웠어요. 우리
전통 음식이 여기 다 있다.
최원호 : 예전 부모님 돌아가시기 전에 우즈베키스탄에서 살 때 생활 모습이 한
국에 들어와서 보니까 그대로였나 보네요?
신조야 : 똑같아요. 내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농촌으로 갔잖아요. 농사짓는 모습
이 똑같아요. 다만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막 손으로 씨를 뿌리니까 어디는 많이 떨
어지고 어디는 적게 떨어져서 추수할 때 달라요. 근데 한국은 밭에 예쁘게 심어
지데요. 풀도 안 보이고 하는데 우리는 피고 뭐고 가득 자라잖아요.
최원호 : 고려인들이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 당해서 척박한 중앙아시아에 자리 잡
으면서도 고향에서 짓던 농사를 그대로 지었군요.
신조야 : 얘기를 들어보면 노란 참외를 먹으면 나오는 씨를 챙겨 갔대요. 강제 이
주 당할 때 아무 것도 챙길 게 없어서 씨만 챙겨 가지고 갔대요. 아무 데 가더라
도 씨를 뿌리면 다 살아난다고 마음먹고 들어갔대요. 안 가면 총에 맞아 죽으니
까. 그러면서 할아버지가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고향에 가봤으면 좋겠는데, 언
제 우리 고향에 가볼 수 있겠냐 했어요. 그때는 한국에서 문도 안 열어줬을 때니
까. 90년대 후반에 김대중 대통령 때 들어와서 우즈베키스탄 고려인들에게 취업
비자를 내주고 싶다고 했어요. 지금 딸하고 둘이 한국에 들어와 살고 있는데, 이
거는 기적이에요.
최원호 : 광주에 고려인 마을을 만들게 된 계기는 어떻게 되나요?
신조야 : 처음에는 이천영 목사님이 혼자 광주 광산구에 있는 외국인들을 위해
봉사했는데요. 감당을 못하니까 나라별로 담당자들을 세워야 되잖아요. 2002년
에 나하고 처음 만났는데, 2004~2005년경에 혼자 너무 힘들다고 같이 일하자
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나도 그때 결정 내렸어요. 다른 도시에 절대 안 간다고 했
죠. 그리고 2006년에 ‘고려인마을’이라고 이름을 붙이게 됐어요. 그 이후에 사람
들이 계속 들어와서 고려인 센터에 월세를 내면서 하나 만들게 됐죠. 지금은 7천
명 정도가 월곡동에 거주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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