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6 - 월간 대한사랑 7.8월호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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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이어 영화를 누린 친일 패밀리, 윤치호 일가(家)

























                                                                 윤치호 가계도 ©식민지역사박물관


                  윤치호의 아버지 윤웅렬은 대한제국 시기 군인 출신으로 1910년 국권이 상실된

                후, 일제가 주는 남작(男爵) 작위를 수작하고 매국 공채 2만 5000원을 발행하였다.
                1911년 윤웅렬이 사망한 후, 남작 작위는 장남인 윤치호에게 승계됐다. 윤치호는

                한때 <독립협회> 회장, <독립신문> 주필, <만민공동회> 지도자 등 항일 활동에 나서
                기도 했으나 ‘105인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후부터 친일에 나서게 된다. 그는

                중추원 고문,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을 지내다 일본 패망 직전 '이토 치카우'로
                창씨개명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으로 귀족원 의원에 선임된 인사는 단 10명이었으
                니, 친일파로서 그의 지위가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윤웅렬의 조카(윤치호의 4촌) 형제들인 치오, 치소, 치영 등도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명단에 올랐으며, 윤치오의 아들인 윤명선까지 만주에서 벌인 반민족 행위로 명단

                에 올랐다. 아버지와 아들, 조카와 종손에 이르는 3대 친일파 집안이다. 이들은 일
                제가 패망하기 전까지 호의호식하며 지냈다. 그럼 해방 후엔 어땠을까? 서울 용산구
                에 있는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보면 윤치호 집안의 가계도가 나와 있다. ‘해방 후

                농림부장관’, ‘해방 후 서울대 총장’이란 문구가 눈에 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자문
                기관인 중추원 참의와 조선기독교연합회 평의원을 지내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오른 윤치소(윤웅렬의 조카이자 윤치호의 4촌)의 아들이 윤보선 전 대통령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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