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3 - 월간 대한사랑 7.8월호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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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7·8
“나라를 되찾지 못하면
가문도 의미가 없다.
공자나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고 떠난 비장한 선택
경술국치의 이듬해인 1911년, 나라가 일본에 빼앗기자 선
생은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길에 올랐다. 만주로 떠나기 전
에 선생은 노비문서를 불태워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켰고, 임
청각을 제외한 전 재산을 팔아 독립자금을 마련했다. “나라를
되찾지 못하면 가문도 의미가 없다”며 조상의 신주와 위패를
모두 땅에 파묻고 떠나 현재 임청각 사당에는 봉안된 신위가
없다.
망명한 뒤 이상룡 선생은 조선의 10대 부호인 이회영 선생
과 함께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학교를 건립하여 무장독
립운동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후 한족회 회장, 서로군정서 독
판(督辦),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임시정부 2차 개헌 때 국가
수반)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 후 독립운동계의 단결을 위해 참
의부, 정의부, 신민부로 나뉜 3개의 정부를 하나로 묶는 삼부
통합운동에 헌신하여 2개로 합치는데 성공하였으나, 그 직후
1932년 해방을 보지 못한 채 만주에서 생을 마쳤다. 선생의
유해는 광복된 지 45년 만인 1990년 중국 헤이룽장성에서 봉
환돼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가, 1996년 서울 동작동 현충
원 내 임정묘역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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