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 - 월간 대한사랑 7.8월호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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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세례’를 받았고, 남아있었을 유해는 또다시 대량으로 멸실되었다.
침몰 원인은 폭침이었다
선체 인양은 현지 언론에 불을 다시 지폈다. 오사카에서 발간되는 <국제신문>
은 1954년 10월 9일자 신문에 ‘8월 22일 오미나토항을 출발할 예정이었는데,
황급히 8월 21일에 출항한다고 선전하면서, “이 배에 승선하지 못한 사람은 귀
국을 보장할 수 없다”며 승선자들을 배 안에 둔 채 하루 밤낮 동안 다이나마이트
와 총포류를 배 밑바닥에 실어 넣었다’고 충격적인 보도를 했다.
▲1953년 10월 우키시마호 인양 당시 선체를 조사할 때 배의 안쪽 밑바닥이 부서진 파편으로 엉켜있
는 모습. 이 사진은 타무라(田村)씨가 사진기를 주머니에 넣고 몰래 찍은 사진을 오사카 <국제신문>이
공개했다. 조사자들이(붉은색 원) 여기저기 서 있다.
이 신문의 사진기자는 1954년 10월 이노사루베지가 스크랩을 목적으로 우키
시마호를 해체하는 작업을 할 때, 선체 밑부분을 촬영하는 데 성공해 두 장의 사
진을 신문에 게재했다. 이 사진에 대해 ‘촉뢰라면 배의 안쪽으로 구멍이 나 있어
야 하는데, 바깥쪽으로 부풀어 있어 배 안에서 생긴 폭발에 따른 것이라는 추측
을 배제할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생존자에 따르면 침몰 직전에 폭발
음을 세 번 들었다고 한다. 만약 촉뢰라면 이 같은 현상은 없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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