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6 - 월간 대한사랑 7.8월호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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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를 비롯한 결사 동지, 김기용, 백규삼, 황병길, 조용순, 강순기, 강창두, 정원
주, 박봉석, 유치홍, 김백춘, 김천화 등 12인은 이곳 크리스키노(연추하리) 마을에
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단지동맹을 하였다. 이들은 태극기를 펼
쳐놓고 각기 왼손 무명지를 잘라 붉은 선혈로 ‘대한독립’이라 쓰고 만세 삼창을
하였다. 동아시아를 쥐고 흔든 이토 히로부미를 단 세 발의 총알로 숨지게 한 안
중근 의사를 기리기 위해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은 2001년 10월 18일, 이
비를 세웠다.
1937년까지 고려인들이 살던 정착촌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독립군을 도
와 전 재산을 내놓았던 최재형 선생 생가를 돌아보았다. 일제는 블라디보스토크
와 연해주 일대 한인촌을 분탕질하고 항일 민족주의자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
여 학살했다. 연해주 한인 민족운동의 대부이자 임시정부 재무총장에 추대된 최
재형을 비롯한 사회지도자 70여 명은 재판도 없이 총살당했다. 일제의 만행에
치를 떨며 이상설 유허비를 찾아갔다.
이상설 선생은 1907년 고종의 밀사
로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 만국평
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됐다. 일본의 침
략행위를 규탄하며 전 세계에 그들의
만행을 알리려 하였으나, 일제의 계략
으로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
는 조국 독립을 위해 대외활동과 독립
운동 기지 건설에 목숨을 걸었고, 근대
민족 교육관을 설립하여 조선인의 자
녀에게 민족독립 사상을 가르쳤다. 안
타깝게도 48세 젊은 나이에 병을 얻어
우수리스크에서 세상을 떠나며 “동지
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
루라. 나는 광복을 보지 못하고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 이상설 선생 유허비
랴. 나의 유골은 불태워 솔빈강에 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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