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7 - 월간 대한사랑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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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촬영된 단군릉의 모습. (제공=미디어한국학)
다. 한편 단군릉 수축을 위해 1934년 봄 단군릉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까지 성금은 총 3600여 원이 들어왔으
몇 가지 문헌을 더 살펴보자. 『단기고
나, 재원에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수호각
사』엔 풍류강을 비류강이라 하였는데, 송
은 건립하지 못하고, 1935년 10월 단군
양도 강동(江東)이라 하여 그곳에 묻혔다
릉제를 끝으로 단군릉수축기성회의 활동
고 하였다. 『신단실기』도 『강동릉변』에서
은 마감되었다.
송양을 강동현이라 했으며, 제1세 단군
이런 여러 기록을 보아 조선시대 이전부 왕검의 릉이 아니라 후대 단군의 릉이라고
터 강동군에는 단군릉이 있다는 것이 입에서 하였다.
입으로 구전되어왔고, 조선 전기에 이르러
단군릉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초대 단
전적에 비로소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군왕검만을 알고 있다면 그분이라고 추
있다. 즉 평안남도 강동 대박산의 단군릉
정할 수 있겠으나, 사실 여러 문헌에 의하
은 실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면 단군은 47대가 이어져 왔다. 『신단실
기』에는 초대 단군이 아닌 후대의 단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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