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5 - 월간 대한사랑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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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6


                      과연 단군릉은 실제 있는 것인가?                      나라에서 단군묘로 전해지는 곳은 강동

                      아니면 북한의 조작일까?                           군에 있는 것이 유일하고 이미 숙종 때에
                                                              강동의 단군묘를 수리하라고 하였으니
                        이 강동현 대박산 기슭의 단군릉에 대
                                                              이곳은 강동군의 단군묘가 틀림없다고
                      해서는 다양한 문헌의 뒷받침이 있다.
                                                              생각된다.

                        1530년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정조실록」에는 1786년 8월 9일에 승
                      에는 “강동에는 두 자리의 큰 무덤이 있
                                                              지 서형수가 “신이 강동에 벼슬할 때에
                      는데, 그 하나는 현의 서쪽 3리에 있으며
                                                              보았는데, 고을 서쪽 3리쯤 되는 곳에 둘
                      둘레 410자나 되는 큰 무덤으로 이를 단
                                                              레가 4백 10척쯤 되는 무덤이 있었습니
                      군묘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 옛 노인들이 서로 단군의 묘소라고
                        『조선왕조실록』의 「숙종실록」 숙종 23                전하고 있었으며, 유형원의 『여지지(輿地
                      년(1697) 7월 4일에는 강동 단군묘에 대한              志)』에 기록되어 있으니, 그것이 참인지 거

                      이인엽의 청을 윤허했다는 기록이 있다.                   짓인지를 막론하고 어떻게 황폐해지도록
                      이인엽은 해마다 강동의 단군묘와 평양                    놔두고 사람들이 마음대로 땔나무를 하

                      의 동명왕묘를 손질하여 가다듬도록 청                    거나 소와 말을 먹이도록 놔둘 수 있겠습
                      하였고 숙종은 이를 모두 허락하였다. 이                  니까?”라고 하자 정조가 평양감사에게 단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서 단군의 무                    군의 묘지기를 정하고 매년 봄과 가을에
                      덤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윤창열 교수                  묘를 둘러보는 것을 제도화하라는 지시
                      는 단군묘에 대한 손질을 요청하고 숙종                   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 즉시 윤허한 것으로 보아 이때에 강동
                                                                「고종실록」에는 1900년 의관(議官) 백
                      의 단군묘에 대한 인지는 보편화되어 있
                                                              호섭(白虎燮)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었을 것으로 보았다.(윤창열, 『환단고기 연구』,
                                                                “평양은 바로 단군, 기자, 동명왕 세 성
                      「제3편 환단고기 진서고(Ⅱ)」)
                                                              인이 수도를 세운 곳입니다. 단군은 맨
                        또한 「영조실록」에는 1739년 5월 23               먼저 나타나 태고 시대에 나라를 여셨는
                      일과 1763년 4월 22일 두 차례에 걸쳐                데, 그가 나라를 세운 것은 당요(唐堯)와

                      영조가 평양감사에게 단군묘를 잘 보수                    때를 같이 하였고, 나라를 보전한 것은
                      하고 관리할 것을 명령한 내용이 기록되                   천 년이나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그의 능

                      어 있다. 이 능묘가 강동군 대박산의 능                  (陵)이 강동군 읍치(邑治)에서 서쪽으로 5리
                      묘라고 명확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우리                   떨어진 태백산 아래에 있습니다. 이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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