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5 - 월간 대한사랑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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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단군릉은 실제 있는 것인가? 나라에서 단군묘로 전해지는 곳은 강동
아니면 북한의 조작일까? 군에 있는 것이 유일하고 이미 숙종 때에
강동의 단군묘를 수리하라고 하였으니
이 강동현 대박산 기슭의 단군릉에 대
이곳은 강동군의 단군묘가 틀림없다고
해서는 다양한 문헌의 뒷받침이 있다.
생각된다.
1530년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정조실록」에는 1786년 8월 9일에 승
에는 “강동에는 두 자리의 큰 무덤이 있
지 서형수가 “신이 강동에 벼슬할 때에
는데, 그 하나는 현의 서쪽 3리에 있으며
보았는데, 고을 서쪽 3리쯤 되는 곳에 둘
둘레 410자나 되는 큰 무덤으로 이를 단
레가 4백 10척쯤 되는 무덤이 있었습니
군묘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 옛 노인들이 서로 단군의 묘소라고
『조선왕조실록』의 「숙종실록」 숙종 23 전하고 있었으며, 유형원의 『여지지(輿地
년(1697) 7월 4일에는 강동 단군묘에 대한 志)』에 기록되어 있으니, 그것이 참인지 거
이인엽의 청을 윤허했다는 기록이 있다. 짓인지를 막론하고 어떻게 황폐해지도록
이인엽은 해마다 강동의 단군묘와 평양 놔두고 사람들이 마음대로 땔나무를 하
의 동명왕묘를 손질하여 가다듬도록 청 거나 소와 말을 먹이도록 놔둘 수 있겠습
하였고 숙종은 이를 모두 허락하였다. 이 니까?”라고 하자 정조가 평양감사에게 단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서 단군의 무 군의 묘지기를 정하고 매년 봄과 가을에
덤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윤창열 교수 묘를 둘러보는 것을 제도화하라는 지시
는 단군묘에 대한 손질을 요청하고 숙종 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 즉시 윤허한 것으로 보아 이때에 강동
「고종실록」에는 1900년 의관(議官) 백
의 단군묘에 대한 인지는 보편화되어 있
호섭(白虎燮)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었을 것으로 보았다.(윤창열, 『환단고기 연구』,
“평양은 바로 단군, 기자, 동명왕 세 성
「제3편 환단고기 진서고(Ⅱ)」)
인이 수도를 세운 곳입니다. 단군은 맨
또한 「영조실록」에는 1739년 5월 23 먼저 나타나 태고 시대에 나라를 여셨는
일과 1763년 4월 22일 두 차례에 걸쳐 데, 그가 나라를 세운 것은 당요(唐堯)와
영조가 평양감사에게 단군묘를 잘 보수 때를 같이 하였고, 나라를 보전한 것은
하고 관리할 것을 명령한 내용이 기록되 천 년이나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그의 능
어 있다. 이 능묘가 강동군 대박산의 능 (陵)이 강동군 읍치(邑治)에서 서쪽으로 5리
묘라고 명확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우리 떨어진 태백산 아래에 있습니다. 이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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