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6 - 월간 대한사랑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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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을의 읍지와 『관서문헌록(關西文獻錄)』                이 명을 내린 것이다.

               에 명백히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고(故)
                                                         이렇듯이 『조선왕조실록』에는 강동의
               상신(相臣) 허목이 지은 『단군세가』에 이르
                                                       단군 무덤에 관한 기록이 내려오고 있다.
               기를, ‘송양(松壤) 서쪽에 단군총이 있는데
                                                       중복된 내용이지만 『승정원 일기』, 『국조
               송양은 곧 오늘의 강동현이다.’라고 하였
                                                       보감』에도 실려 있다.
               으니, 확실한 증거가 참으로 명백한 것입
               니다. 이 고을의 산림을 봉식(封植)하자는                   게다가 『동국여지승람』을 증보한 『신
               내용으로 여러 번 부군(府郡)에 청한 것이                 증동국여지승람』의 제55권 「강동현」 편

               문서와 편지에 가득 쌓여 있으니, 이것은                  을 보면 대박산에 있는 고적으로 큰 무덤
               누가 시켜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라고                   이 있다며 하나는 강동현의 서쪽으로 3리

               하며 강동의 단군묘를 단군릉으로 봉하                    에 있으며, 둘레 4백 10척으로 속담에 단
               지 않았으니 강동의 단군묘를 기자릉과                    군묘라고 전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

               동명왕릉의 전례에 의거하여 똑같이 높여                   국여지승람』 이외에 강동의 단군묘를 처
               단군릉으로 숭대하자는 상소를 올린 것                    음 기록한 문헌은 1656년 유형원이 지은

               이다.                                     『동국여지지』 이고, 이후 허목이 지은 『미
                                                       수기언』, 안정복이 지은 『동사강목』, 이긍
                 「순종실록」에 보면 1909년 1월 31일
                                                       익이 지은 『연려실기술』 등에 잇달아 기
               (순종께서)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우리나
                                                       재되었다.(윤창열, 『환단고기 연구』, 「제3편 환단
               라에서 처음으로 나온 성인인데, 사당의
                                                       고기 진서고(Ⅱ)」)
               모습이 고요하다. 숭령전(崇靈殿)에 평안남

               도 관찰사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                    1932년 5월에는 평안남도 강동 대박
               라. 듣건대 묘소가 강동 땅에 있으며 지                  산의 단군릉의 수축사업이 알려지면서

               금 그것을 가리켜 단군릉이라고 하는데,                   단군유적보존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
               잡초가 우거진 채로 거두지 않고 있다고                   기도 하였다. 단군묘로 알려진 이 능이 일

               하니 높이 받드는 예차가 전혀 없다. 이제                 제하에 들어 황폐해지자, 이를 증수하고
               부터 관리하고 수호하는 절차를 마련하                    수호각을 세우기 위해 평안도 강동 지방

               여 거행하도록 하라.”라는 명을 내린다.                  유지들이 ‘단군릉수축기성회’를 발기하
               고종 37년 이후 9년 만의 기록으로 강동                 였다.
               의 단군묘를 단군릉으로 호칭하고, 지금                     이 운동은 언론사인 <동아일보>에서

               부터라도 잘 관리하고 수호하도록 순종                    주목하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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