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9 - 월간 대한사랑 6월호
P. 29

2024. 06



                     府條)>와 『응제시주(應制詩註)』, 『제왕운기(帝              도 기록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춘추필법(春
                     王韻紀)』, 『동국통감(東國通鑑)』 등 많은 기록              秋筆法)으로 해석된 번역본만을 볼 수밖에
                     을 통해 고조선의 건국과 존재시기가 동                    없는 것이다.

                     시대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수천 년간 난무했던 “미필적 고의 번역”
                     의 많은 문헌이 당요 시기 25년에 단군조

                     선이 건국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순임금과 동후의 만남을 어떻게 해석하
                     홍산문화(紅山文化) 발굴, BCE 2400년경의               고 전할 것인가를 가장 고민한 사가는 사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 연구 성과,                  마천으로 보인다. 삼황오제의 중원 역사

                     위영자문화(魏營子文化) 연구 등을 통해 고                  틀을 잡은 그가 순임금이 상위의 인물 ‘동
                     조선의 실존은 고고학적으로 증명되고 있                    후’를 만났다는 것을 후세에 어떻게 전할

                     다.                                       가를 고민한 것 같다. 사마천 『사기』「오
                       하지만 중원의 고대 초기 역사 문헌에                   제본기」에는 ‘수견동방군장(遂見東方君長)’

                     서 동방 고조선의 실체를 명확히 찾을 수                   이라고 기록하여 ‘사(肆)’의 의미를 ‘수(遂)’
                     있는 기록은 많지 않다. 특히 통치자 단군                  로, 천자와 제후 간의 의례 문제가 도출되

                     에 대한 사실적 기록은 거의 전무하다고                    는 ‘근(覲)’대신 ‘견(見)’으로 용어를 대체하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나마 비교적 초기                   여 알현(謁見)인지 단순한 견(見)인지 역사
                     기록인 『산해경(山海經)』과 『관자(管子)』, 사              적 사실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또한 후(后)

                     마천의 『사기(史記)』에서 고조선에 대한 언                 의 사용 의미가 『서경』에서 「순전(舜典)」 이
                     급을 찾아볼 수 있으나, 춘추필법(春秋筆法)                 후로 천자와 동격개념으로 사용되었기에

                     의 사관으로 기록된 문헌 속에서 명확한                    후(后)대신 군장(君長)이란 용어로 대체하
                     단군과 조선에 대한 기록을 기대하기는                     여 동후가 왕인지 제후인지 구분도 애매

                     어렵다. 『서경』도 중원 초기 제국들 역사                  하게 만들었으며, 후세의 주석가들은 중
                     기록이라는 입장에서 주변국에 대한 기록                    화 중심적 사관으로 근(覲)의 의미를 무시

                     을 제후, 혹은 이적만융(夷狄蠻戎)이라는 프                 하고 제후로 일관하는가 하면 한 발 더 나
                     레임 속에서 기술되거나 해석될 수밖에 없                   가 ‘동쪽의 제후들을 불렀다’는 등의 있지
                     었다.                                      도 않은 내용을 첨가하여 원래의 뜻을 희

                       그렇기에 오늘날에도 우리는 『서경』의                   석시켰다. 그리고 순이 동순수(東巡守)를 하
                     “肆覲東后協時月 正日 同律度量衡 修五禮                    면서 사근동후(肆覲東后)한 것처럼 서, 남,

                     五玉三帛二生一死贄 如五器 卒乃復” 기록                    북에서도 의례로써 제후들을 만났다고 번
                                                              역하였지만, 원문은 그러한 내용이 없고



                                                                                                  27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