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0 - 월간 대한사랑 5월호
P. 100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가다
1911년, 30대 초반에 독립운동을 위해 가
족들과 함께 만주로 가서 왕청현(길림성 연변
조선족자치주)에서 활동을 한다. 청일학교(靑一
學校)와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설립하여 청
년 동지들에게 민족정신을 교육하였다. 국권
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력이 필요하다는 생
각으로 의병들을 모아 중광단을 조직하여 군
대를 양성하고, 후에 대한군정부, 대한군정
특강을 경청하는 참석자들 서로 이름을 바꾸면서 독립운동사에서 무력
투쟁을 선도한다. 1918년 여준(呂準)·정신(鄭
독립운동가인 서일 장군의 석상을 모신 복기 信)·김동삼(金東三)·유동열(柳東說) 등 39인의 서
대 교수와, 정길영 관장, 또 역사를 사랑하는 명으로 3.1운동에 앞서 독립선언서를 발표
많은 분들의 애정과 관심, 그 동안의 노고에 하여 독립운동을 촉발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감사함을 표했다. 1919년에는 계화(桂和)·채오(蔡五)·양오(梁吾) 등
박환 교수의 강연과 기타 자료를 통해 서 과 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하여 신문을 발간하
일 장군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같다. 왕청현은 지리적으로 산이 많은 골짜기인
데, 유명한 대전자령 전투가 일어난 곳이기도
서일 장군의 유년기와 젊은 시절
하다. 대전자령 전투는 1933년 7월 지청천
서일(徐一) 장군은 1881년 2월 26일에 함경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중국군 부대와 연합하
북도 경원에서 출생했다. 도호(道號)는 백포(白 여 일본군을 대파한 전투이다. 봉오동 전투,
圃)이고 본관(本貫)은 이천으로 시조 서신일(徐 청산리 전투와 함께 항일무장투쟁사상 3대
神逸)의 36세이고 본관은 이천이다. 어릴 때 대첩으로 평가받는 전투이다. 왕청현은 또한
한학을 공부했고 주역을 공부했다. 신학문도 독립군 사관 양성학교였던 동림무관학교가
배우기 위해 함일실업학교(咸一實業學校)의 전 세워진 곳이기도 하다.
신인 사숙(私塾)에 입학하여 1902년 졸업했다.
한학과 신학문을 기반으로 1902년부터 10여 대종교 입교와 단군사상 체계화
년간 고향에서 아동 교육과 계몽운동을 전개 만주로 간 1911년 서일 장군은 홍암 나
한다. 철 대종사를 만나 감화를 받고 『삼일신고』
98
월간대한사랑_6호_본문.indd 98 2024-04-29 오후 12:5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