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1 - 월간 대한사랑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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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신리대전』 등 대종교 경전을 탐독했다. 일 장군이 사람들을 잘 다독여 군자금을 걷
1912년 10월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교리 고 능숙하게 이끌게 되면서 체코군이 넘기는
연구와 포교활동에 주력한다. 그는 대종교 무기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된다. 크고 무거운
교리를 체계화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일제 당시의 소총과 무기들을 사서 가져오는 것은
는 조선의 민족혼을 강조하는 대종교를 없애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서일 장군
버리려고 한다. 대종교의 창시자인 나철 선 은 성능이 좋은 모신나강 소총과 맥심 기관
생은 일제의 탄압을 받다가 황해도 구월산 총을 구입해서 오게 되고, 그 무기로 청산리
에 들어가 자결하게 된다. 그의 뒤를 이어 김 전투를 승리고 이끈다. 1920년 6월 봉오동
교헌이 2대 종사를 맡았다. 역사에 능했던 김 전투에 이어 동년 10월에 이룬 쾌거였다.
교헌은 한국 역사 속에서 단군을 체계화한 청산리 독립 전쟁을 수행한 것이 바로 북
다. 한학과 주역에 능한 서일 장군은 단군 사 로군정서인데, 총책임자는 바로 서일 장군이
상을 종교적으로, 이론적으로 체계화했다. 서 고 그가 북로군정서의 총재였다. 그리고 우리
일 장군은 우리 고유의 핵심 사상인 삼일철 가 잘 아는 김좌진 장군은 북로군정서의 총
학(三一哲學)을 체계화한 사상가이기도 했으며. 사령관이다. 총재와 사령관이 힘을 합쳐서 우
《회삼경》, 《오대종지강연》, 《삼일신고강의》, 리 역사 속에서 가장 빛나는 항일 무장 투쟁
《구변도설》, 《진리도설》, 《삼문일답》 등을 인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쌍두마차
집필했다. 의 한 사람이 서일 장군이고, 김좌진 장군의
출생지가 홍성군 갈산인데, 갈산에 서일 장
북로군정서와 청산리 전투의 승리 군의 석상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굉장히 의미
1차 세계대전 때 체코 군대는 러시아 편에 있는 일이라고 박환 교수는 강조했다.
서서 활동을 했다. 체코는 헝가리 제국의 지 청산리전투에서는 군인들만 싸운 것이 아
배를 받은 경험이 있어서 일본 제국주의에 신 니었다. 당시 여성들과 동포들이 행주산성의
음하는 조선 사람들을 도와주고자 했다. 그 행주치마처럼 먹을 것을 나르고 후방지원을
들은 러시아혁명 후 체코로 다시 돌아가면서 하면서 전투를 승리할 수 있었다. 이들의 활
자신들이 쓰던 총과 무기를 독립운동가들에 약상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되겠다.
게 헐값에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충청
도 출신의 김좌진 장군은 현지에 다수를 차 자유시 참변과 서일 장군의 조천(朝天)
지하던 함경북도 사람들을 이끌고 독립자금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참패를 당
을 조달하기가 어려워 무기를 살 수가 없는 한 일제는 5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독립군
형편이었다. 그런데 같은 함경도 출신인 서 대토벌 작전을 벌인다. 조선 동포들을 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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