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1 - 월간 대한사랑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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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5



                와 『신리대전』 등 대종교 경전을 탐독했다.                    일 장군이 사람들을 잘 다독여 군자금을 걷
                1912년 10월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교리                 고 능숙하게 이끌게 되면서 체코군이 넘기는

                연구와 포교활동에 주력한다. 그는 대종교                      무기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된다. 크고 무거운
                교리를 체계화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일제                     당시의 소총과 무기들을 사서 가져오는 것은

                는 조선의 민족혼을 강조하는 대종교를 없애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서일 장군
                버리려고 한다. 대종교의 창시자인 나철 선                     은 성능이 좋은 모신나강 소총과 맥심 기관
                생은 일제의 탄압을 받다가 황해도 구월산                      총을 구입해서 오게 되고, 그 무기로 청산리

                에 들어가 자결하게 된다. 그의 뒤를 이어 김                   전투를 승리고 이끈다. 1920년 6월 봉오동
                교헌이 2대 종사를 맡았다. 역사에 능했던 김                   전투에 이어 동년 10월에 이룬 쾌거였다.

                교헌은 한국 역사 속에서 단군을 체계화한                          청산리 독립 전쟁을 수행한 것이 바로 북
                다. 한학과 주역에 능한 서일 장군은 단군 사                   로군정서인데, 총책임자는 바로 서일 장군이

                상을 종교적으로, 이론적으로 체계화했다. 서                    고 그가 북로군정서의 총재였다. 그리고 우리
                일 장군은 우리 고유의 핵심 사상인 삼일철                     가 잘 아는 김좌진 장군은 북로군정서의 총

                학(三一哲學)을 체계화한 사상가이기도 했으며.                   사령관이다. 총재와 사령관이 힘을 합쳐서 우
                《회삼경》, 《오대종지강연》, 《삼일신고강의》,                  리 역사 속에서 가장 빛나는 항일 무장 투쟁
                《구변도설》, 《진리도설》,  《삼문일답》 등을                  인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쌍두마차

                집필했다.                                       의 한 사람이 서일 장군이고, 김좌진 장군의
                                                            출생지가 홍성군 갈산인데, 갈산에 서일 장

                북로군정서와 청산리 전투의 승리                           군의 석상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굉장히 의미
                  1차 세계대전 때 체코 군대는 러시아 편에                   있는 일이라고 박환 교수는 강조했다.

                서서 활동을 했다. 체코는 헝가리 제국의 지                      청산리전투에서는 군인들만 싸운 것이 아
                배를 받은 경험이 있어서 일본 제국주의에 신                    니었다. 당시 여성들과 동포들이 행주산성의

                음하는 조선 사람들을 도와주고자 했다. 그                     행주치마처럼 먹을 것을 나르고 후방지원을
                들은 러시아혁명 후 체코로 다시 돌아가면서                     하면서 전투를 승리할 수 있었다. 이들의 활

                자신들이 쓰던 총과 무기를 독립운동가들에                      약상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되겠다.
                게 헐값에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충청

                도 출신의 김좌진 장군은 현지에 다수를 차                     자유시 참변과 서일 장군의 조천(朝天)
                지하던 함경북도 사람들을 이끌고 독립자금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참패를 당
                을 조달하기가 어려워 무기를 살 수가 없는                     한 일제는 5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독립군

                형편이었다. 그런데 같은 함경도 출신인 서                     대토벌 작전을 벌인다. 조선 동포들을 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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