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8 - 월간 대한사랑 24년 2월호 (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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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대산 위치
니, 온조가 “좋다”라고 하였다. 이에 배를 만 좇아 드디어 하남 위지성(慰支城)에 도읍을 정
들어 바다를 건너 먼저 마한의 미추홀(彌鄒忽: 하고, 국호를 백제(百濟)라 하였다. 백 사람이
지금의 인천 부근)에 이르러 사방을 돌아다녀 보 건너왔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뒤에
았으나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비류가 세상을 떠나자 그 신하와 백성이 그
오랜 뒤에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 땅을 바치며 복종했다.(「고구려국본기」)
악(負兒岳)에 올라 살 만한 땅을 찾아보았다.
그때 마려(馬黎), 오간(烏干) 등 신하 열 명이 간
백제 건국 장소
하였다.
이유립이 『환단고기 정해』에서 주석을 단
“오직 이곳 하남(河南) 땅은 북으로 한수(漢
水)를 끼고, 동으로 높은 산이 자리잡고, 남쪽 내용을 바탕으로 필자의 견해를 덧붙이면 다
음과 같다.
으로 기름진 평야가 열리고, 서쪽은 큰 바다
(황해)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처럼 천연적으
로 험준한 지형과 지리적인 이로움은 얻기가 “패수(浿水)의 패는 백(白)이 된다”고 했는데,
쉽지 않은 형세이오니, 마땅히 이곳에 도읍 지금의 난하(灤河)로 추정된다. “대(帶)는 계주
을 정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다른 곳을 더 (薊州) 풍윤현(豐潤縣) 동쪽 80리에 요대산(腰帶
찾지 마옵소서.” 온조가 신하 열 명의 의견을 山)이 있으니 대수(帶水)가 여기서 나온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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