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5 - 월간 대한사랑 24년 2월호 (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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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의 기록 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하였다. 부끄럽고
후회하여 죽으니 그의 백성들이 모두 위례에
귀부(歸附)하였다. 올 때에 백성들이 즐겨 쫓
았으므로 후에 국호를 백제(百濟)라고 고쳤다.
기존 강단사학계의 백제 건
그 세계(世系)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
국에 대한 인식은 기본적으
로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 때문에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 이어서 작은 글씨로 주석이 달려 있는데, 위와 중복
과 같다. 되는 내용을 피하고 요약을 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시조는 비류왕으로 아버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아버지가 주몽이다, 는 우태(優台)니 북부여왕 해부루의
주몽이 북부여(필자주: 동부여인데 북부여로 오인하 서손(庶孫)이며, 어머니는 소서노(召
고 있다)에서 졸본부여로 도망왔는데, 졸본부 西奴)니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여왕은 아들이 없고 세 딸만 있었다. 그는 주 소서노가 처음 우태에게 시집가서
몽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고 그의 둘째 딸
비류와 온조를 낳았고, 우태가 죽
과 결혼시켰다. 부여왕이 돌아가시자 주몽은
자 과부로 지냈다. 주몽이 서기전
임금이 되었다. 주몽은 여기서 두 아들을 낳
37년 2월에 남쪽으로 졸본에 이르
았는데 비류와 온조이다.
러 고구려를 세우고 소서노와 결
주몽이 북부여(필자주:동부여의 오기이다)에 있
혼하여 왕비로 살았다. 주몽이 예
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
씨(禮氏)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와 온조는 오간(烏干), 마려(馬黎)등 10명의 신
유류(孺留)가 찾아오자 그를 태자로
하와 함께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한산(漢山)
세웠다. 비류가 온조에게 말하기
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 살 곳을 바라
를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
보았다. 비류는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에 가
서 나라를 세우는 것이 더욱 좋겠
서 살고,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
다” 하고는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
고 10신(臣)의 도움을 받아 국호를 십제(十濟)
(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
라 하니 이때가 기원전 18년이었다. 비류는
추홀에 가서 살았다.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었으므로 위례성으로 돌아와 보니 도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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