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2 - 월간 대한사랑 24년 1월호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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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진실은? - 영류제 시해에 대한 건
역사상 유례없는 100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공한 수나라는 살
수대첩에서 대패한 뒤 멸망하였다. 이후 중원 정세는 급격한 변화를 겪으
며 여러 군웅들이 할거하였다. 수나라와 전쟁이 끝나고 영양태왕이 붕어
하자, 이복동생 고건무가 즉위하니, 바로 고구려 제27세 영류제이다.
영류제는 당나라와 화친 정책을 추진하였는데, 전체적으로 저자세의
외교 노선을 견지하였다.
물론 수나라와 대전을 겪은 뒤이기에 전략적으로 친선을 도모할 필요
성은 있었겠지만, 필요 이상의 저자세가 문제였다. 당에 고구려의 봉역
도(封域圖, 강역도)를 바친 일(628년)이나, 당의 후방을 견제해 줄 수 있는 세
력인 돌궐 주력군이 당에 의해 격파되고, 힐리가칸이 사로잡혔을 때, 고
구려가 수수방관한 부분은 이해하기 어렵다. 여기에 631년 대수(對隋) 전
승기념탑인 경관(京觀: 적의 시체를 쌓아 높이 흙으로 봉하는 것. 일명 해골탑)을 당
의 요청으로 헐어버렸다. 이는 수나라 전쟁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유가족
들에게는 큰 상처를 주었다. 그래서 강력한 상무(尙武)정신과 주체 의식을
가진 연개소문을 위시한 대당 강경파들의 격렬한 반발을 사기에 충분하
였고, 이에 반발해 연개소문을 중심으로 정변을 일으켰다. 이 정변은 단
순히 권력을 탐한 쿠데타가 아니고 지나친 대당 굴욕외교로 일관한 영류
제와 그 세력에 대한 연개소문과 대당 강경파의 혁명적 기의(起義)였다.
즉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지닌 정치 세력이었다면,
영류제는 독자적인 천하관을 포기하고, 당 제국에 복속됨으로써 존속을
도모하는 정치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세계관 차이는 정변을
불러왔고, 이에 승리한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642년 10월 고구려 수도 평양 장안성 남쪽 벌판에서 다수의 고구려 귀
족들이 목숨을 잃었다. 변고를 들은 영류제는 평복으로 몰래 달아나 고
추모 성제가 다물도로 삼은 바 있는 송양(松壤)에 이르러 병사를 모집하였
으나, 나라 사람이 한 명도 오지 않으니 이에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다고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서는 전하고
있다. 기존 기록과는 사뭇 그 사실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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