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4 - 월간 대한사랑 24년 1월호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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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진실은? - 무자비한 독재자인가?
연개소문은 정변을 일으킨 뒤 영류제의 아우 대양왕의 아들 보장제(寶
臧帝)를 제위에 올렸다. 보장제는 무조건적인 강경책을 펴지는 않았다. 당
의 국교인 도교 수입을 자청하여 독자적인 천하관을 유지하면서도, 전술
의 유연성을 택하는 정치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연개소문은 이후 내정
을 안정시킨 뒤 당 태종과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여 승리로 이끈 출중한
지용과 비상한 통솔력을 지닌 영걸이라고 할 수 있다.
연개소문은 다방면으로 외교정책을 펼쳤다. 우선 백제의 상좌평 성충
(成忠)과 함께 양국이 병존하는 방안을 세웠다. 성충은 연개소문과 만나고
의자왕에게 보고하길,
“만약 연개소문이 10년만 일찍 고구려 대권을 잡았
으면 능히 당나라를 멸망시켰을 것”이라며 연개소문
을 높게 평가하였다.
연개소문이 보기에 만일 백제를 적으로 돌린다면, 백제와 당의 수군이
서해에서 연합함대를 형성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면 큰일이라고 판
단한 것 같다.
그 무렵 남쪽에는 백제와 신라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보장제
와 비슷한 시기에 즉위한 의자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서부 40
여 성을 빼앗고, 신라 수도 서라벌을 지키는 요충지인 대야성을 함락시키
고, 성주 김품석 내외를 죽였다. 김품석은 김춘추의 사위로, 김춘추는 자
기의 딸 고타소랑을 죽인 백제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다. 고구려
에 구원을 요청한 김춘추에게 연개소문은 삼국이 연합하여 당나라를 정
벌한 뒤에 본래 우리 땅이던 황하와 양쯔강 중류 이동에 연합 정권을 세
워 함께 다스려 나가자고 세 번이나 권유하였다. 하지만, 김춘추는 딸을
잃은 원한과 당에 대한 사대주의에 사로잡혀 끝내 듣지 않았다. 그 후 김
춘추는 당 태종과 밀약을 맺었고, 백제와 고구려는 내부 분열과 나당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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