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3 - 월간 대한사랑 24년 1월호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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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설정된 기준 왕이 연나라의 위만에게 정권을 빼앗김으로써 또다시
중국인의 통치를 받는 속국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 과정에서 위만정권
의 도읍지를 한반도 평양으로 비정한 한국사학자들에 의해 기자조선의
위치도 자연스럽게 현재의 평양 중심지역으로 이동해 왔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기자는 고조선의 영역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삶을 마친 인
물이다. 또한 위만정권의 위치는 중원의 초기 사서에서는 하북성과 요서
지역으로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중국사대주의 유학자들의 모화사상(慕華思想)은 기자
를 평양으로 불러 들였고, 위만정권 위치 또한 평양 중심으
로 조작되고, 위만정권은 위만조선이라는 나라로 탈바꿈하
였다.
5 위만정권이 우거 때 한무제(漢武帝)에 의해 붕괴되고, 한의 4개 군이 설
한반도 북부는 치되었다고 한국사는 기술하고 있다. 당연히 그 위치는 북한의 평양 낙
한(漢)·위(魏)·진(晉)
의 고대 영토 랑군을 중심으로 설정되어 있다. 중원의 1차 사료는 위만정권의 위치기
술과 같이 낙랑군 또한 하북성과 요서지역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최근
북경 근처에서 발굴된 낙랑군 조선현의 한현도(韓顯度) 무덤과 1997년 요
녕성 금서시에서 발견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封泥)가 고고학적으로
그 위치를 가늠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한국사학계는 이를 무시하고 조
선유학자의 주장을 더 근거 있게 받아들여 평양의 고분이 한(漢)나라의
낙랑군 유적임을 계속 주장하여 왔다.
광복 후 북한 사학계는 3천여기의 고분 발굴 성과를 바탕으
로 평양의 낙랑고분은 한나라의 낙랑군 고분이 아닌 고조선
계 낙랑국(樂浪國) 고분임을 밝혔고, 주도 세력의 고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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