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1 - 국제학술문화제-정신문화 분과
P. 151

한국 선사암각화에 반영된 공동체 의식  박선식






























                             그림 1 인면도상과 윷널이 함께 표현된 암각화(만주 길림 집안 지역에 있음)



                   또한 중국측의 유명한 고전의 하나인 『서경』의 ‘우공’기사를 보면 서기전 7세기보다 훨씬 이전
                 인 하우씨의 시기(대략 서기전 23세기 전후)에 이미 ‘島夷’라는 세력에 의해 皮服이 조달되고 있었

                               4)
                 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기록은 중국 측에서 서기전 7세기경의 발조선 사람들의 선조를 島夷라고
                 지칭하였고, 그들은 수렵활동을 통한 거친 맹수의 사냥과 연해안을 잇는 연안항로를 이용하여 하

                 우씨 영역 안으로 일정한 교역행위를 벌였다는 대체적 생활양태를 가늠할 수 있게 이끈다. 따라서
                 우리는 하우씨 당시의 도이세력을 ‘海陸共同體’라고 불러도 큰 무리가 없을 듯이 여겨진다.  그들
                                                                                                  5)
                 이 서기전 7세기경에 중국 측에 의해‘발조선’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점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추


                 4) 이익(李瀷, 1681~1763)은 所作인 『星湖僿說』에서 은나라 시절의 ‘부열’(인명)을 거론했는데, 더불어 ‘고죽의 옛
                 터가 오늘의 遼瀋에 있으면서 북해의 바닷가로 일컬어지는 것이다.’고 밝혔다. 이어 덧붙이길 ‘요심은 옛날 幽州의 지경
                 이며, 舜이 터전을 닦은 곳이다.(遼瀋古幽州之境而舜所肇開也)’고 하였다. 또한 ‘단군·기자의 시대에 이 고장은 조선에
                 통합되었었다.(檀箕之世其地統於朝鮮)’고 밝혀 요심의 바닷가가 분명히 단군왕조와 기자시절의 옛 조선인의 강역이었
                 음을 거론했다. 이러한 기록의 내용으로 이미 단군과 기자의 시절에 옛 조선인들이 북해(곧 발해-필자 주)의 연해안을
                 장악하여 삶의 기반으로 운영하였음을 알 수 있고, 그것은 필자가 제시한 해륙공동체의 한 거점으로 가치를 지닌 것임
                 을 미루어 추론하게 된다.
                 한편 『尙書正義』를 보면,‘구려’의 천자로 거론되던 상고시기 치우와 그 세력을 싸잡아 ‘도둑올빼미(賊鴟)’라고 지칭한
                 점이 주목된다. 어떻든 치우와 그 세력을 상징한 짐승이 올빼미(또는 수리부엉이)였고, 그 올빼미(혹은 수리부엉이)가
                 날쌘 사냥능력을 갖춘 점은 흥미로운 점이다. 더불어 한국의 근대기에 적지 않게 등장한 우국적 역시기록물에서 치우를
                 현대 한국인의 선조로 상정하며 거론한 예가 참고가 된다. 또한 역시 근대기 일부 한국인들에게 조명된 ‘어아가’ 등의
                 상고관련 노랫말에 ‘큰 활(大弓)’이 빈번하게 거론됨은 한국 상고선조들이 큰 활 등을 통한 왕성한 수렵활동을 펼쳤을
                 개연성을 느끼게 한다. 뿐더러 중국측 문헌들을 보면 孔子가 적시한 숙신세력의 ‘楛矢’라는 수렵도구의 존재자체도
                 한국과 관련한 상고시기 선조들이 드러냈던 수렵활동의 한 단면을 추론하게 한다. 이후 小水지역을 점유한 세력을 小水
                 貊이라 했는데 그 貊이 한 猛獸를 지칭한 것이란 점도 역시 한국 선조들의 수렵활동에 연관한 단서를 느끼게 하고 있다.
                 5) 필자는 전승문헌기록을 통해 상정한 先발조선사회인들이 수렵활동을 통해 얻은 文皮 등의 산물을 다시 연해안 경로
                 를 통한 국제적 교역을 병행한 점에 해륙공동체적 생활기풍이 있었다고 상정한 것이다. 그러한 해륙공동체적 생활기풍
                 은 상고시기 지도자(단군 등)에 의해 원거리로 펼쳐졌을 남방 순행경로의 동남연해 거점의 하나로 여겨지는 울산지역
                 의 점유세력에게도 공통적으로 내제된 생활양상이라고 여기고 본고를 전개함을 밝힌다.



                                                                                                    151
   146   147   148   149   150   151   152   153   154   155   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