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19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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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본 위치 인식에 대한 고찰 길이숙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솔빈(率賓), 속빈(速頻), 소빈(蘇濱)이 모두 원래 고구려의 졸본
이라고 하였다. 74)
졸본의 옛 땅은 지금 흥경지방에 있다. 『위서』에 흘승골성이라 한 곳이 바로 여기다. 75)
옛 졸본 땅은 지금 개원현 동남에 있고 두 물을 건넌 곳이다. 개원은 옛 부여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개원현 남쪽 십여 리에 청하가 있으니, 즉 옛 니하의 하류로서 서쪽으로 대요하로 들어간
다. 주몽이 처음 도망치고 말 탄 사람들이 쫓아올 때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는 곳이
지금의 청하이다. 또 이른바 보술수는 청하를 건너고 동남으로 이백리 가까이 달아나서 첨정산
북에 이르면 강이 하나 가로지르는데 지금의 혼하 상류요, 납록하 하류이다. 비류수는 지금 흥경
북쪽에 다섯 강물과 합하여 흥경 서남을 돌고 다시 북으로 흘러 소자하가 되고, 서쪽으로 혼하로
흘러간다. 다섯 강물이 서로 가깝기 때문에 어느 것이 비류인지 알 수 없으나, 요컨대 졸본은 지
금의 흥경 북쪽 물 건너 땅이며 다른 데서 찾을 수는 없다. 76)
고 하였다.
이익(李瀷, 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고추모의 무덤이 개평현 동병산에 있고, 77) 국내주
가 압록강 북쪽에 있으니 졸본 역시 압록강 북쪽에 있고, 성천은 동부여가 졸본에서 옮겨간 것으로
보았다. 78) 당시 사람들이 성천을 졸본으로 삼는 것은 잘못이며, 발해의 졸빈(卒賓)을 졸본이 아닌
가 하였다. 79)
74) 丁若鏞, 『定本 與猶堂全書』 「我邦疆域考」 其三 卒本考, 案盛京志。率賓府恤品路。分而二之。不檢金史故也。今按率賓。
亦云速頻。亦云蘇濱。皆番音之翻轉也。其最古之源。卽句麗之卒本。而卒本之紇升骨城。明在興京界內
75) 위주 참고, 卒本故地。在今興京界內。魏書所謂紇升骨城是也。
76) 위주 참고, 其三 卒本考, 鏞案卒本故地。要在今開原縣之東南。涉二水之處。開原古扶餘。 今按開原縣南十餘里。有淸河。
卽占泥河之下流。西入大遼河者也。朱蒙始逃。追騎在後。則其所謂魚鼈成橋者。今之淸河水是也。又其所謂普述水者。旣渡淸
河。東南走近二百里。至尖頂山北。有一河中橫。卽今渾河之上流。納綠河之下流也。其所謂沸流水者。今興京之北。五河合流。
繞興京而西南。又北流爲蘇子河。西入渾河者。是也。五河相近。不知何者爲沸流。要之卒本者。今興京之北隔水之地。不可以
他求也。
77) 안정복은 요동 복주 명왕산이라고 하였다.
78) 李瀷. 『星湖僿說』 제2권 天地門, 당(唐) 나라 총장(總章) 2년에, “압록강 북쪽의 항복한 성이 이미 11개였다.”고
했는데 국내주(國內州)가 그 속에 끼었으니, 그렇다면 졸본은 역시 압록강의 북쪽에 있었음을 알 수가 있으며, 《통고》에
마자수(馬訾水)의 한 이름은 압록강인데 근원이 말갈 백두산에서 나와 국내성의 남쪽을 지난다.” 했으니, 압록강에서
멀고 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고, 《성경지》에, “옛날 부여국이라는 것은 현도(玄菟)의 북쪽 천 리에 있었으며,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해 있었다.” 하고, “동명(東明)의 무덤은 개평현(盖平縣) 동병산(東屛山)에 있다.” 했으니, 또한
증명할 수가 있다 하겠다. 대개 해부루가 처음 졸본으로부터 성천(成川)으로 옮겨갔으므로 해모수는 실상 졸본의 옛
땅에 웅거했었으며, 주몽이 또한 성천에서 화를 피하여 졸본으로 들어와서 아비를 계승하여 임금이 되었던 것인데,
똑같이 부여라는 국호를 썼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성천을 졸본이라고 했던 것이다. 唐總章二年鴨綠以
北已降城十一而國內州居其一則知卒本亦在鴨綠以北也通考馬訾水一名鴨綠源出靺鞨白山經國內城南則知距鴨綠不逺也
盛京志古扶餘國在玄莵北千里南與句麗接東明墓在盖平縣東屏山亦可證盖觧夫婁始自卒本移成川而觧慕漱實居卒本舊地
朱蒙又自成川避入卒本嗣父為君也以其同一扶餘之號故後人錯認以成川為卒本矣
79) 李瀷 『星湖僿說』 제2권 天地門 渤海黃龍, 今人以成川為卒本非也 渤海之卒賔恐是其地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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