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85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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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교과서 세종 육진의 위치 비정 비판 최원호
據)되었다. 태조 7년에 처음으로 부(府)를 공주(孔州)에 설치하고, 비로소 경원(慶源)이라 일컬
었다. (중략) 〈태종〉 10년에 알타리(斡朶里) 추장(酋長)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가 심처
(深處)의 야인(野人)을 유인하여 침입해 와서 부사(府使) 한흥보(韓興寶) 등을 살해하였다. 이
리하며 민호(民戶)를 옮겨 경성군(鏡城郡)에 합속(合屬)시키고 그 땅을 비워두었었다. (중략)
〈세종〉 16년에 옛 지경을 회복하기로 의논하고서, 소다로(所多老)의 땅이 넓고 기름지며, 적
(賊)이 오가는 길의 요해처(要害處)가 된다 하여, 고기(古基)의 북편(北偏)인 회질가(會叱家)의
땅에다 벽성(壁城)을 설치하고, 남도(南道)의 민호(民戶)를 이주시켜 채우고서 부(府)를 옮기고
판관(判官)과 토관(土官)을 두었다. 그 뒤에 석성(石城)으로 고쳐 쌓았다. 〈세종〉 24년에 진절
제사(鎭節制使)를 두고, 31년에 온성(穩城)의 덕천보(德川堡) 북편(北偏)의 땅을 갈라서, 산막
동(山幕洞)에서 중대령(中大嶺)에 이르는 지역을 내속(來屬)시켰다. (중략)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두만강에 이르기 20리, 서쪽으로 어두파현(於豆波峴)에 이르기 20리, 남쪽으로 바다
에 이르기 1백 20리 남짓하고, 북쪽으로 마유산(馬乳山)에 이르기 15리이다. 동림성(東林城)
【부의 동남쪽 30리에 있다.】 35)
경원도호부는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창업한 기초가 된 지역이다. 연혁을 보면 태종 때에 그 땅을
비워둔 적도 있지만 세종 16년에 옛 지경을 회복하기로 의논하고 벽성을 설치하고 남도의 민호(民
戶)을 이주시켜 관리를 두었다. 세종 24년에는 주변으로 더 넓힌 기록을 볼 수 있다. 당시의 사방
경계를 보면 동서 간 거리가 40리 이고, 남북 간 거리가 135리 이다. 동쪽 경계가 두만강이고 남쪽
은 바다에 접해 있다고 했다. 당시 기록으로 경원도호부의 면적은 1.186㎢이다. [조선향토대백과]
에서 경원군은 910여 ㎢로 나온다.
③ 온성도호부
사(使)가 1인이니, 진 절제사(鎭前制使)가 이를 겸하고, 판관(判官)이 1인이니, 경원도 좌익 병
마(慶源道左翼兵馬)를 겸한다. 본래 고려(高麗)의 땅이었는데, 중간에 야인(野人)이 또한 그 땅
의 빈 것을 틈타 들어와 살면서, 이름을 다온평(多溫平)이라 하였다. 세종 22년에 비로소 군(郡)
을 설치하고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어, 경원(慶源) 및 길주(吉州) 이남에서 안변(安邊) 이북까지
의 각 고을의 민호(民戶)를 옮겨 채웠다. 〈세종〉 23년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켜 판관(判官)
을 두고, 또 토관(土官)을 설치하였다. 〈세종〉 24년에 진(鎭)을 설치하여 절제사(節制使)를 겸
하게 하였다. 사방 경계[四境]은 동남쪽으로 경원(慶源) 경관령(慶關嶺)에 이르기 43리, 서쪽으
로 종성(鍾城) 지경에 이르기 53리, 남쪽으로 덕천보(德川堡)에 이르기 1백 35리, 북쪽으로 두
만강에 이르기 2백 75보(步)이다. 36)
35) 『세종실록』 155권 「지리지」 함길도 경원도호부
36) 『세종실록』 155권 「지리지」 함길도 온성도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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