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81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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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교과서 세종 육진의 위치 비정 비판 최원호
사서는 세종실록 지리지보다 후대에 편찬된 책이다. 『동국여지승람』은 17년, 『서정록』은 62년이
흐른 뒤의 기록들이다. 역사 연구에 있어서 가장 기본은 당대의 기록을 우선하는 것인데 의아한
부분이다.
그런 의도가 반영된 것인지 몰라도 쓰다 소키치가 『조선역사지리』를 편찬할 때 사료에 대한 치
밀한 연구를 통해 지리 비정을 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는 몇 가지 대목이 있다. 먼저 6진 중의 하나
인 온성과 관련된 내용을 기술하면서 『동국여지승람』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데 다음과 같다.
세종 22년 수주가 강의 굽이진 곳으로 깊숙이 들어가서 적로의 요충이므로, 드디어 군치를 이곳
으로 옮겼다.(世宗二十二年, 以愁州陡入江隈, 賊路要衝, 遂移郡治于是) 수주(愁州)는 『용비어
천가』 제4장 주석에 수주(隨州)로 되어 있다. 이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요동지』에 나오는 주
(州) 이름으로 원대(元代)부터 있었던 호칭일 것이다. 『여지승람』 종성 조항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종 22년 비로소 군을 설치하고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경원 및 고[길]주의 남쪽과 안변의 북쪽
에 있는 여러 고을의 민호를 옮겨 채웠다.(世宗二十二年始置郡, 改今名, 徒慶源及古[吉]州南,
安邊北諸邑民戶, 實之)
고주(古州)란 영고탑(寧古塔)인 듯한데, 그렇다면 늘 그렇듯이 과장된 말일 것이다. 조선인은
이러한 일조차 명백한 허언을 한다. 32)
쓰다 소키치는 6진 중에서 후기에 설치된 온성 조항을 설명하면서 경원 및 고주의 남쪽, 안변의
북쪽에 있는 민가를 옮겨 온성을 채웠다는 세종실록지리지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고주(古州)가 영고탑인데 그것은 과장된 말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고주가 영고
탑 33) 이 맞다면 육진은 이미 두만강을 넘어 북쪽에 위치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앞서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초대 총재였던 고토 신페이가 “문사적(文事的) 시설을 가지고 타
(국)의 침략에 대비하고, 일단 유사시에는 무단적(武斷的) 행동을 돕는 편(익)을 아울러 강구해 둔
다”고 했듯이 만철에서 연구비를 지원받으면서 연구한 쓰다 소키치는 철저히 정치적 목적 하에 연
구를 진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4. 한국사 교과서 세종 육진 위치 비정 비판
현재 한국사 교과서에서 조선 세종시대 개척한 6진의 위치로 비정하고 있는 곳은 함경북도 두만
31) 조선 중종11년(1516)에 세종 대에 이천이 서북경의 파저야인을 토벌하고 4군을 개척할 때 사실을 기록한 책이다.
32) 쓰다 소키치, 『조선역사지리』 제2권, 남만주철도주식회사 편, (1913), 350쪽
33) 영고탑은 청 나라 만주지방의 지명으로 오늘날의 흑룡강성 목단강시 영안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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