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84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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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 분과
리지]에는 한성부를 중심으로 경기를 포함한 팔도의 지리지를 수록하고 있다. 그 중에 함길도 편에
서 조선 전기의 동북면 지역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조선 전기에 간행된 관찬지리서로서 세 번째로
만들어진 지리지로서 세종 6진이 개척된 당대의 기록으로 그 중요성이 있다.
① 경흥도호부
사(使)가 1인이니, 경원도 좌익 병마(慶源道左翼兵馬)를 겸한다. 옛 공주(孔州)의 땅이다. 태조 7
년에 옛 토성(土城)의 터에 의지하여 석성(石城)으로 고쳐 쌓고, 그 땅에 덕릉(德陵)·안릉(安陵)
의 두 능이 있고, 또 왕업(王業)을 일으킨 땅인 까닭으로, 이름을 경원부(慶源府)라고 하였다. (중
략) 〈세종〉 17년에 공주(孔州) 근방(近傍)의 3백 호(戶)를 떼어 붙여서 공성현(孔城縣)으로 일컫
고, (중략) 〈세종〉 19년에 군(郡)으로 승격시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중략) 성(城)을 동쪽·
서쪽·북쪽 3면(面)으로 물려서 쌓아 넓히고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다. 대천(大川)은 두만강
(豆滿江)이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두만강에 이르기 10보(步), 북쪽으로 두만강에 이르
기 10리, 남쪽으로 큰 바다에 이르기 60리, 서쪽으로 웅구참(雄丘站)에 이르기 90리이다. 34)
세종실록지리지가 편찬된 단종 2년(1454)에 경흥도호부는 태조 7년에 선조들이 살던 지역으로
왕업을 일으킨 경사스러운 땅이란 의미로 ‘경원부(慶源府)’로 부르던 곳이다. 세종 19년에 ‘경흥’
이란 이름으로 고치고 군으로 승격시켰다고 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경홍도호부의 사방 경계
에 대한 기록이다. 당시의 거리 단위로 계산하면 경흥도호부의 전체 면적을 알 수 있다. 물론 정확
한 면적을 계산하는데 한계가 있겠지만 경흥으로 비정된 현재 지역의 면적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유의미한 시도가 될 것이다.
동쪽으로 두만강에 이르기 10보, 서쪽으로 웅구참에 이르기 90리, 그리고 남쪽으로 큰 바다에
이르기 60리, 북쪽으로 두만강에 이르기 10리라고 적고 있다. 동서의 거리가 90리이고 남북간의
거리가 70리 정도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의 주척(周尺)법으로 6척(尺)이 1보(步)라고 했다. 360보
가 1리(里)이다. 1보는 두 발자국으로 약 1.3m이다. 1리(里)는 468m이다. 당시의 거리단위를 기
준으로 경흥도호부의 면적을 계산하면 1,344㎢이 나온다. 앞서 살펴본 [조선향토대백과]에 나오
는 경흥 지역의 면적은 940여 ㎢로 나온다. 물론 15세기 당시의 경흥도호부의 행정구역이 오늘날
의 경흥군과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고 지리지의 사방 경계 기록만 가지고 정확한 면적을 계산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차이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② 경원도호부
사(使)가 1인이니, 진절제사(鎭節制使)로써 겸하게 한다. 판관(判官)이 1인이니, 본부(本府) 중
익 병마(中翼兵馬)를 겸한다. 본래 고려(高麗)의 땅이었는데, 중간에 호인(胡人)에게 점거(占
34) 『세종실록』 155권, 「지리지」 함길도 경흥도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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