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77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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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교과서 세종 육진의 위치 비정 비판 최원호
는 1914년 강연에서, ‘문장적무비’란 “문사적(文事的) 시설을 가지고 타(국)의 침략에 대비하고,
일단 유사시에는 무단적(武斷的) 행동을 돕는 편(익)을 아울러 강구해 둔다”라고 설명 25) 했다. 그런
생각 속에서는 식민지 경영에 있어 토지조사 등의 구관제도조사(舊慣制度調査)가 매우 중요하며,
이런 현지조사가 식민지 지배에 상당한 기여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고토 신페이에게 1907년 12월 무렵에 「만주역사편찬の급무」라는 보고서
를 제출했다. ‘만주와 조선의 지리와 역사 그리고 고고학적 연구’를 일본학자들이 진행해서 일본
동양학에 새 영역을 열고 확립하는데 연구자금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결국 1908년 1월에 도쿄의 만철지사에 만선역사지리조사부가 설치되었다. 시라토리 구라키치
가 조사부의 주임을 맡았고, 야나이 와타루[箭內亘] · 마쓰이 히토시[松井等] · 이나바 이와키치[稻
葉岩吉] · 세노 우마쿠마[瀨野馬熊]는 ‘만주역사지리’연구를 담당했다. 1908년 4월부터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 쓰타 소키치[律田左右吉]가 합류하여 ‘조선역사지리’연구를 담당했다.
당시 남만주철도주식회사는 상당한 연구비를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은행원들의 초임
급여가 35엔이었는데 1인당 연간 약 700엔 정도의 연구비를 지원했다고 한다. 5년간 2만 엔으로
연간 4천 엔 정도의 연구비를 지원한 것이다.
특히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조사부의 명칭을 정할 때 ‘만선역사조사부’라고 하지 않고, ‘만선역
사지리조사부’라고 해서 ‘지리’를 포함시킨 것은 역사 전개에 있어서 지리적 특성이 큰 영향을 끼
친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26)
2) 『조선역사지리』 연구 구성원
앞서 말했듯이 만선역사지리조사부는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주임을 맡고 이케우치 히로시와 쓰
다 소키치가 ‘조선역사지리’연구를 담당했다.
이케우치 히로시(1878~1952)는 조사부에 합류할 당시 30대 초반으로 왕성한 연구활동을 할
수 있는 나이였다. 그는 에도(江戶)시대의 유학자로 막부 말기의 존양파(尊攘派)였던 [池內大學
(1814~1863)]의 손자였다. 1901년에 동경제국대학 사학과에 입학한 인물로 대학원에 진학한
1908년 1월부터 조사부의 보조위원으로 참가했다.
쓰다 소키치(1873~1961)는 18세인 1890년에 동경전문학교 방어(邦語) 정치과에 편입해서 이
듬해 졸업한 인물이다. 본래 소설과 시를 즐겨했던 사람으로 시라토리 구라키치의 영향으로 역사
학에 입문하게 되었다. 시라토리 구라키치의 지시로 동양과 서양의 역사, 그리고 일본사와 관계된
교과서를 편찬하면서 역사 교양을 체득했다고 알려져 있다. 조사부의 일원이 되면서 역사학연구
생활을 출발하게 되었다. 쓰다 소키치도 연구원으로 참여하게 된 시기가 35세의 젊은 나이였
다. 27)
25) 滿鐵會 編, 『滿鐵四十年史』, 吉川弘文館, (2008), 28~29쪽 참조
26) 박찬흥, 「만선역사지리조사부와 고대 ‘만선역사지리’ 연구」『역사와 담론』75, 2015, 135~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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