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76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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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 분과
더불어 한 가지 주목할 기록이 있다. 조선 세종 때부터 중종 때까지 여진과 왜와의 전쟁에 관해
기록한 『국조정토록(國朝征討錄)』 21) 서문에 보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기록 가운데에서 우리 군사인 경우에는 ‘정벌하였다(征)’ 또는 ‘토벌하였다(討)’고 하였고, 적병
인 경우에는 ‘도적질하였다(寇)’ 또는 ‘반란을 일으켰다(叛)’고 표현하였다. 외적을 공격하였을
때는 ‘습격하였다(襲)’나 ‘싸웠다(戰)’라고 하였고, 적을 무찌른 경우에는 ‘베었다(斬)’ 또는 ‘사
로잡았다(虜)’고 표현하였다. 모두 강목(綱目)의 서례(序例)에 따른다. 22)
『국조정토록』의 서문에서 표현의 원칙을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 군사인 경우에는 ‘정토(征討)’라
고 쓴다는 것이다. 『자치통감강목』 서례를 따랐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다.
무릇 정통(正統)에서 신하로서 참월(僭越)하여 반란을 일으킨 데에 병사를 사용하였으면 ‘정
(征)’이나 ‘토(討)’라고 하고, 이적(夷狄) 또는 그 신하가 아닌 경우에는 ‘벌(伐)’이라고 하고 ‘공
(攻)’이라고 하며 ‘격(擊)’이라고 한다. 병사로 응하는 경우에는 ‘비(備)’, ‘어(禦)’, ‘거(拒)’라고
한다. 모두 그 본문에 따라서 칭한다. 23)
정토(征討)라는 개념은 신하로서 참월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진압하는 용어로 쓴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은 여진을 공격할 때 ‘정토’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여진을 적이 아닌 신하의 개념으로
인식한 것이며, 여진이 거주하는 지역도 조선의 영토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진의 주거
지역도 조선의 관리 아래 있는 영토로 이해할 수 있다. 24)
3. 『조선역사지리』의 국경사관
1) 만선역사지리조사부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 이후부터 조선에 대한 공략론인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었다. 1910년
대한제국에 대한 강제 합병 이전부터 역사적 명분을 만들기 위한 작업들도 진행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의 ‘만선사(滿鮮史)’연구이다. 특히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1908
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초대 총재였던 고토 신페이[後藤新平]을 설득하여 ‘만선역사지리조사부’
를 설치한 인물이다.
고토 신페이는 대만 민정장관 출신으로 ‘문장적무비(文裝的武備)’란 말을 유행시킨 인물이다. 그
21) 조선 전기 일어난 7차례의 대외 정벌사를 기록한 책으로 최초 편찬자와 저술 과정은 불확실하다.
22) 『國朝征討錄』「凡例」; 凡錄中 我師稱征稱討 賊兵稱寇稱叛 攻敵稱襲稱戰 克敵稱斬稱虜 皆從綱目序側
23) 『資治通鑑綱目』, 「凡例」, ‘征伐’;허우범, 『여말선초 서북 국경과 위화도』, 책문, (2021), 323쪽 재인용
24) 허우범, 『여말선초 서북 국경과 위화도』, 책문, (2021), 3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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