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74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P. 274
동북공정 분과
3) 여진인과의 관계
여진(女眞)은 우리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종족이다. 고래로부터 숙신(肅愼), 읍루(挹婁), 물
길(勿吉), 말갈(靺鞨)로 불리던 종족으로 10세기 초인 송나라 때 처음으로 여진으로 불리기 시작했
다. 여진족은 발해가 멸망한 이후 그 지역에 거주하면서 한반도의 동북면 지역인 흑수부에 있던
말갈족을 불렀던 다른 이름이다. 고려는 그들을 동여진, 생여직이라 했으며 현재 길림성의 서남부
지역에 있던 여진을 서여진 또는 숙여직이라 하였다.
이런 여진 세력은 조선 건국 이후에도 늘 상대해야 하는 존재였다. 기록을 보면 조선 태종대부터
선조 대까지 약 131회나 조선을 침입했다. 14) 세종이 “우리의 외환은 북방에 있다.” 15) 고 말한 것은
단적으로 이런 상황을 보여준다. 그래서 조선도 건국 이후 대 여진 정책으로 회유와 강경책을 구사
했다.
태조 이성계가 건국 공신인 정도전을 동북면도선무순찰사로 삼을 때 부행(副行)으로 함께 했던
이지란을 도병마사(都兵馬使)로 삼은 것도 대(對) 여진정책의 일환이었다. 이지란은 여진의 유력
추장 출신이었다. 행정구역 획정에 따른 여진 세력의 동요를 막고 협조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16)
태조 7년 동북면 행정구획은 여말선초에 이주해온 여진 세력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세종 19년에
중추원부사 은아리(殷阿里)가 고려말에 동북면에 이주한 여진 제 세력의 규모를 보고한 내용을 보
면 알 수 있다.
이주 시기 추장명 호구 본 거주지 이주지
공민왕21년 童甫下 20戶 端川 咸興·定平
(1372) 殷阿里 300戶 縣城平 咸興·定平
金高時帖木兒 30戶 吉州 安邊
許難豆 10戶 吉州 安邊
朱仁 40戶 咸興 洪原
우왕11년 朱萬 40戶 咸興 洪原
(1385)
劉阿郞哈 20戶 咸興 洪原
金波寶下 10戶 吉州 洪原
劉所羅 20戶 吉州 洪原
우왕12년
李芝蘭 500戶 北靑 預原·和州·高原
(1386)
<표2> 고려말 동북면으로 이주한 여진 세력 현황 17)
14) 강성문, 「조선시대 여진정벌에 관한 연구」『군사』18, (1989), 71쪽
15) 『세종실록』 권55, 14년 2월 10일 기해 ; “我國之患, 在於北方。”
16) 조용철, 「조선 초기 여진관계의 변화와 동북면 지역 진출 과정」『역사학보』233, (2017)
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