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73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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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교과서 세종 육진의 위치 비정 비판 최원호
2) 동북면 지역에 대한 인식
조선왕조실록에는 ‘동북면’에 관한 원문 기사가 347회 등장한다. 그 중에서 조선 초기에 해당하
는 태조로부터 세종까지 337회 등장한다. 특히 태종대에 248회 등장한다. 그 만큼 조선초기의 ‘동
북면’에 관한 인식은 조선 건국의 태생지로서 중요하게 여겼던 곳이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한 첫
해에 이방원을 동북면에 보내 사대(四代)의 능실에 제사를 지내고 왕위에 오른 일을 고하고 능호를
9)
올리게 했다. 즉 이성계의 고조부모로부터 부모의 묘까지 있는 동북면은 조선 건국의 태생지로
서 결코 방기할 수 없는 지역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조선 초기에 ‘동북면’ 지역의 명칭이 삭방·청
해·길주·영흥·영길·함길도 등으로 상당한 변화 10) 가 있었지만 ‘동북면’이란 명칭은 지명의 변화
와 상관없이 꾸준히 통칭으로 사용되어 왔다.
태조 이성계는 7년 2월에 건국 주역이었던 정도전을 동북면도선무순찰사로 임명하면서 동북면
을 크게 영흥도와 길주도로 구획하여 다스리기 시작했다. 11) 자신의 조선 건국의 태생지로서 조상
대대로 살던 터전인 동북면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이다. 그런데 7년 3월에 정도전이 동북면도선무
순찰사로 명령을 받아 진행한 일에 대해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이지란과 함께 내조한 자리에서 이
성계는 이렇게 말하였다.
경의 공(功)이 윤관보다 낫다. 윤관은 다만 구성(九城)을 쌓고 비(碑)를 세운 것뿐인데, 경은 주
군(州郡)과 참로(站路)를 구획(區劃)하고 관리의 명분(名分)까지 제도를 정하지 않은 것이 없어
서, 삭방도(朔方道)를 다른 도와 다를 바가 없이 하였으니 공이 작지 않다. 12)
위 기록을 보면 3세기 전인 고려 예종 때 윤관이 여진을 공격해서 세운 구성(九城)의 위치가 동북
면도선무순찰사인 정도전을 보내 행정구역으로 구획한 영흥도와 길주도의 위치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13) 이성계는 여진족들이 할거하는 동북면 지역에 대해 분명한 영토의식을 갖고 국가
경영의 한 지역으로 인식하면서 행정구역을 명확히 한 정도전의 공(功)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영흥도와 길주도는 또 다른 이름인 삭방도로 불려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9)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태조1년 8월 기사 : 丁巳/遣今殿下于東北面, 祭四代陵室, 以告卽位, 仍上陵號: 皇考曰定
陵, 皇妣曰和陵, 皇祖曰義陵, 皇祖妣曰純陵, 皇曾祖曰智陵, 皇曾祖妣曰淑陵, 皇高祖曰德陵, 皇高祖妣曰安陵.
10) 정은정, 「고려말 동북면 경계의 공간분절과 다층적 권력」『지역과 역사』39, (2016), ~쪽
11)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태조7년 2월 기사 : 東北面都宣撫巡察使鄭道傳分定州府郡縣之名, 遣從事崔兢以聞。 安
邊以北、靑州以南, 稱永興道, 端州以北、孔州以南, 稱吉州道, 令東北面都巡問察理使統治之.
12)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태조7년 3월 기사 : "卿之功浮于尹瓘矣。 瓘只是築九城樹碑而已, 卿區畫州郡站路, 以至
官吏名分, 莫不定制, 令朔方道無異諸道, 功不細矣。"
13) 현행 한국사 교과서 8종 중에서 금성출판과 지학사만이 윤관의 여진정벌과 관계된 지도를 싣고 9성의 위치와 관련
해서 세 가지 설을 싣고 있다. 함흥평야 일대설, 길주 이남설(두만강이남설), 두만강 유역설(두만강이북설)이다. 그 중
에서 두만강유역설(두만강이북설)에서만 9성 중 공험진의 위치를 두만강 북쪽으로 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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