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75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P. 275

한국사 교과서 세종 육진의 위치 비정 비판  최원호



                   <표2>를 보면 고려 말에 동북면 지역으로 이주한 여진족이 990호에 달한다.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세종 때 경원도호부의 호수가 1,162호이고 인구가 5,271명이란 기록이 있다. 한 호(戶)당 약
                 5명의 인구로 계산하면 고려 말에 동북면 지역으로 이주한 여진족의 인구수가 최소 5,000명에 달

                 한다. 결코 적지 않은 인구수이다. 그만큼 여진족들도 여말 선초에 동북면을 그들의 생활 본거지로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진족이 조선의 동북면 지역을 중요한 생활 본거지로 삼게 된 이유는 경제 형태의 변화에 있었
                 다. 여진족은 본래 물과 소나 말을 키울 수 있는 풀밭을 찾아서 거주하는 생활형태와 사냥과 수렵

                 행위를 생업으로 삼았기 때문에 영토에 대한 관념이 희박했다.                      18)  그런 여진족이 14세기를 전후해
                 수렵·채집활동에서 농경사회로의 변화를 겪게 된다. 수렵과 채집 중심의 생활방식만으로는 지속

                 적인 생산력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었다. 생산력 발전을 위해서는 농업과 교역이 중요한 경제 단위
                 가 되어야 했다. 그런데 농경사회로의 진입을 위해 필요한 것이 노동력의 확보였다. 공식적인 물품

                 및 인력 확보의 방법은 교역이었지만 국제 정세의 변화로 교역 단절이나 시장 폐쇄가 될 경우에
                 약탈이 행해졌던 것이다.          19)

                   그런 면에서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동북면 지역에 있는 여진과의 관계는 계속되는 고민거리
                 였을 것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당시 여진 인들의 협조가 있었고 건국 공신 중에 여진 추장들

                 도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적대적인 관계로만 상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성계의
                 선조들의 묘가 동북면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상대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을 것이다. 일례

                 로 아래 기록을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상고하건대, 삼산 천호(參散千戶) 이역리불화(李亦里不花) 등 10처 인원(十處人員)이 비록 여
                    진(女眞) 인민(人民)에 속해 있기는 하나, 본국 지면(本國地面)에 와서 산 지가 연대가 오래고,

                    호인(胡人) 나하추(納哈出) 등의 군사와 왜구(倭寇)의 침략을 여러 번 겪었기 때문에, 조잔(凋
                    殘)하여 거의 다 없어지고, 그 유종(遺種)의 남아 있는 것이 얼마 없으며, 또 본국의 인민과 서로

                    혼인하여 자손을 낳아서 부역(賦役)에 이바지 하고 있습니다.                    20)



                   태종실록에 실린 위 기록을 보면 조선과 여진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 조선
                 국경 내로 들어와서 사는 여진 인들도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혼인을 통해 자손을

                 낳고 조선의 백성으로서 의무적으로 노역에 참여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17) 조용철, 「조선 초기 여진관계의 변화와 동북면 지역 진출 과정」, 45쪽
                 18) 『元史』「地理志」 合蘭府 水達達等路條 “無市井城郭 逐水草爲居 以射獵爲業”
                 19) 김윤순, 「14~17세기 약탈과 교역을 통해 본 여진경제」『만주연구』15집, (2013), 129쪽
                 20)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태종4년 5월 기사 : 欽此切詳, 參散千戶李亦里不花等一十處人員, 雖係女眞人民, 來居本
                 國地面, 年代已久, 累經胡人 納哈出等兵及倭寇侵掠, 凋瘁殆盡, 其遺種存者無幾。 且與本國人民交相婚嫁, 生長子孫, 以供
                 賦役



                                                                                                    275
   270   271   272   273   274   275   276   277   278   279   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