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92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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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 분과
위의 도표 중 周易 繫辭의 복희(伏羲)라는 인물에 대하여 고찰할 필요가 있다.
『十八史略』에는 태호복희씨(太昊伏羲)는 성이 풍(風)이고 머리는 사람이고 몸통은 뱀이다. 팔괘
(八卦)를 그리고 서계(書契)를 만들었다 69) 고 했지만 낙빈기의 『중국상고사신론』에는 복희(伏羲)
라는 명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비판하고 있다.
복희씨(伏羲氏)를 ‘大皥(太昊)’로 높인 것은 하(夏)나라 皐(皞)氏 족계가 400여 년간 통치한 결과
이며, ‘大皞’는 역대 왕실이 우(禹)를 시조로 받들어 부른 호칭이다. 그러나 춘추 후세의 사가들은
오히려 大皞를 제소호(帝少皥)에 대응하여 부르고 그 보다 앞에 놓는 오류를 범하였다. 漢 武帝가
‘太初’로 改元하여 문화의 창시자로 자처한 것처럼, 大皞 伏羲氏는 일찍이 대규모의 更命改制를 실
시(이 점에 대하여는 필자가 뒤에 전문적으로 論證할 것임)하였는 바, 이것이 후세에 잘못 전해져
그가 마치 진짜 創世主인 양 오인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世次에 있어서 大皞는 共工氏 뒤에, 그리고
黃帝는 炎帝의 앞에 놓여 실제와 거꾸로 되었다. 특히 秦의 분서갱유(焚書坑儒) 이후 漢晋의 史家들
은 이 인수용미(人首龍尾)의 복희씨에 대하여 그 실체를 도저히 밝혀낼 수가 없었다. 분서갱유(焚書
坑儒) 이전에도 西周 왕실은 자기 씨족을 높이고자 그 선조를 신격화하였다. 70)
이러한 근거는 夏禹가 帝舜 사위의 신분으로 신흥 노예주 혁명파의 영수인 帝舜를 죽인 후 마땅
히 유호씨(有戶氏)에게 계승되어야 할 왕위를 찬탈한 뒤 대규모 갱명개제(更命改制)를 실시한 후에
비로소 문자상에 반영되어 나타난 것이다. 실제로 이는 새로운 역사단계의 시작을 나타내는데 불
과하였을 뿐인데, 후인들은 이를 동방 인류문화의 시발로 오인하여 2천여 년 간 대 착각을 초래하
였다. 71)
『史記』본기에는 왕권의 계승을 두고 부자 또는 왕족 간의 다툼이 있기 마련이다. 이와 같이 五帝
시기의 인간관계를 다음과 같이 예문(例文) 72) 을 요약한 후에 왜곡된 부분을 바로 잡도록 하겠다.
예문1) “황제는 서릉족의 딸, 뉘조와 혼인하여 두 아들 현효(玄囂)와 창의(昌意)를 낳고, 창의
(昌意)는 아들 전욱 고양(高陽)을 두었다고 하였다. 전욱 고양은 황제가 죽자 왕위를 잇고, 고양
이 죽자 백부 현효의 손자 고신(高辛)이 왕위를 이었으며, 고신(高辛)은 전욱 고양(高陽)의 족자
(族子)이다. 제곡 고신(高辛)의 아들은 방훈(放勛)과 지(摯)를 두었는데, 고신 사후 지(摯)가 왕
위를 이었고, 지(摯)가 정사를 못하니 동생인 방훈이 제위를 계승하니 이가 요(堯)다. 요가 즉위
후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 선정에서 자신의 아들 단주(丹朱)와 공공(共工)의 추천을 물리치고
곤(鯀)을 치수관으로 임명하지만 업적을 세우지 못하고 홀아비인 우순(虞舜)에게 두 딸인 아황
(娥皇)과 여영(女英)을 시집보내어 차기 왕의 자격을 시험하였다.”
69) 曾先之·司馬遷,『十八史略史記年表』, (동경:富山房, 1984), 2쪽.
70) 駱貧基, 金載燮 외 옮김,「중국상고사신론」,『金文新考』하, 한국금문학회, (2020), 179쪽.
71) 駱貧基, 위의 책, 180쪽.
72)『史記』예문은 정범진 외 번역본을 참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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