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89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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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고대 문명 역사공정에 대한 대응전략 이일걸
<표 2> 중화문명탐원공정(2004-2015) 추진 및 실행 계획
단계 기 간 연 구 업 무
예비 연구 2002-2003
제1단계 2004-2005 서기전 2500-1500까지 유적들에 대한 연구
제2단계 2006-2008 서기전 3500-1500까지 유적들에 대한 연구
제3단계 2009-2015 서기전 3500-1500까지 새로운 考古 발굴 결과에 대한 종합적 연구
*『양분도사(襄汾陶寺): 1978-1985년 발굴보고서』출판,
최종 단계 2015.12.12 * 12년의 ‘중화문명탐원공정’ 완료를 기념하여 북경에서 ‘도사유지·도사문화
출판·학술연토회’ 개최
* 요(堯) 시기의 왕성이던 임분시의 陶寺 유지를 발굴하여, 하-상-주의 중원 역사를 그 이전의 요순시대로 끌어올
려 당요(唐堯)-우순(虞舜)-하우(夏禹)-상탕(商湯)-주공(周公)의 새역사시대 계보를 재정립 시도.
(우실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요하문명』(2018), 84-69쪽에 근거 작성)
「광명일보」(2013.5.8.)에 발표한 왕 외(王 巍)의 기사는,“중국이‘ 하상주단대공정’을 추진했어
도 중국의 문명사는 상(商, 서기전 16세기)시기에는 3500년이고, 하(夏, 서기전 2070)시기에는
4000년 내지 3500년밖에 안되고, 하(夏) 이전의 역사는 신화적인 색채로 인해 ‘중화문명 5천년’
은 국제학술계의 공인을 얻지 못하는 상황이니, 자신은 하(夏) 이전의 역사를 밝혀, ‘중화문명 5천
년’을 증명하여 중화민족의 응집력을 높이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에 공헌하기 위한 자신의 꿈
을 실현하기 위해서 10.5계획, 11.5계획, 12.5계획에서 연속적으로 중화문명탐원공정을 제안하
고 이끌었다. 중화문명의 족보를 밝히는 중화문명탐원공정은 개인의 꿈이며, 전체 考古學者들의
사명이라고 하였다.”
위의 기사 내용을 보면, 중국의 고대사가 사마천이 『사기』에 기록한 서기전 841년 공화 원년에
서 비로소 시작한다는 사실이 중국인들에게는 자존심이 매우 상하는 일임을 알 수 있다. 자격지심
인지 몰라도 중국 학계는 우리의 발해사와 고구려사를 임의대로 왜곡하였다. 우리 민족의 첫 개국
한 국가인 고조선(단군조선)을 한사코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부정하는‘기자동래설’을
인용하여, 기자가 평양에서 ‘기자조선’을 세운 것이 우리 민족의 최초의 국가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화문명탐원공정의 결과 요하문명지역은 중화주의 시조인 황제족의 문명이며, 홍산
문화시기에는 황제의 후예인 전욱과 제곡 세력에 의해 ‘초기 문명단계’에 진입했다 하였으며, 황
제족의 요하문명이 남하하면서 황화문명을 만나 중국문명이 꽃피는 것이기에 요하문명이 실질적
으로 중화문명의 시발지라는 것이 중국학계의 지론이다. 65)
이제 중화문명탐원공정을 끝낸 중국 학계는 요(堯) 시기의 왕성이었던 평양(平陽)의 陶寺 유지를
발굴하여 또 다른 공정을 시도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오랜 세월 동안 한족(漢族) 학자들
65) 위의 책, 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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