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2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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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 분과 2
돌아가 숭상)하려 백제(百濟)를 도경(道逕-길을 빌어 지남)하여 선방(船舫-배)을 장치(裝治-다스
려 준비함)했는데, 구려(句驪)가 무도(無道)하여 꾀하여 삼키려 하고 변례(邊隸-변방의 하잘것없
는 자)들을 략초(掠抄-노략질)하고 빼앗고 죽이기를 그치지 않아 매번 와서 막으며 양풍(良風-좋은
바람)의 실기(失期) 하니 비록 진로(進路-나아갈 길)를 말해도 혹통혹불(或通或不-혹은 통한다 하
고 혹은 못한다 함)한다 합니다. 신(臣)의 망고(亡考-죽은 선친)인 사이(濟)가 구수(寇讎-원수)들이
천로(天路)를 옹새(壅塞-막음)함을 실로 분해하여 백만(百萬) 번 활을 당겨 의성(義聲-의로운 소리)
이 감격(感激)하여 드디어 크게 일으키려 하였는데 갑자기 부형(父兄)의 상(喪)을 만나 유업의 성공
을 일궤(一簣-얼마 안 되는 분량)도 얻지 못하고 양암(諒闇)에 거처하며 병갑(兵甲-병기)을 움직이
지 못하니 이로써 언식(偃息-걱정 없이 편히 누워 쉼)해 이루지 못합니다. 지금 연갑치병(練甲治兵
-병사와 무기를 다스리고 연마함)하고자 부형지지(父兄之志-아버지와 형의 뜻)를 펴니 의사(義士)
들이 호랑이처럼 끓고 문무(文武)가 공들인 효험이 있습니다. 백인(白刃-번뜩이는 칼)이 서로 앞다
투고 또한 돌아보지 않는 바입니다. 만일 제덕(帝德-황제의 덕)이 부재(覆載-하늘과 땅을 덮음)하
려면, 저 강적(彊敵)을 꺾고 방난(方難)을 극정(克靖-이겨냄)하여 앞선 공(功)을 바꾸지 마십시오.
감히 스스로를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와 그 나머지를 감가(咸假)하니 내려주셔서 충절(忠節)
을 권하십시오.”라 했다.
10) 『南齊書』 건원원년(建元元年)(CE 479) 조(詔)하여 부(武)를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
모한육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왕(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에
제수(除授)했다.
※ 3)와 8)에서 왜왕의 자칭(自稱)일 때는 백제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5)와 10)에서 송 또는 남제에서
벼슬을 내릴 때는 백제가 빠져 있다. 왜가 요구한 것은 규슈에 있는 백제를 얘기한 것이었으나, 송
(宋)과 남제에서는 너희가 백제를 지배한다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삭제한 것이었다. 그런 연유
로도 위에서 언급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모한은 한반도 사람들이 규슈로 건너가서 세운 작은
분국들로 볼 수 있다.
※※ 9)에서 갑자기 부형(父兄)의 상(喪)을 당한 해가 CE 478년이다. 당시 3년 상을 치렀으므로 부형이
돌아가신 해는 CE 475년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왜에서 CE 475년 왕과 태자가 한꺼번에 상을
당한 것은 백제 개로왕과 그의 태자뿐이다. 고구려 장수왕이 쳐 내려와서 개로왕과 그의 태자 등을
아차산에서 목을 베었다. 왜왕 부(武)는 8)에서 고오(興)의 동생으로 언급이 되고 있지만, 왜왕 부
(武)는 섬에서 태어난 사마왕으로 개로왕의 아들이자, 왜왕 고오(興)의 조카였다. 왜왕 부(武)는 나중
에 백제로 돌아가서 무령왕으로 즉위하였다. 9)의 상표문으로 이 사실을 밝힌 학자는 원광대학교
소진철 명예교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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