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1월의 독립운동가, 이봉창
독립운동의 꽃이 된 청년, 이봉창
권정심 기자
젊은 나이에 인생을 불살라 독립운동의 꽃이 된 청년 이봉창. 한때 역무원이었던 이봉창 의사의 삶을 추억하며 코레일에서는 이봉창 의사 전시회를 역사마다 돌아가며 개최했다.
나라는 독립되었지만 아직도 일재의 잔재가 그대로 남은 부분이 역사이다. 나라의 형체는 독립했건만, 나라의 혼과 같은 역사는 아직도 일본이 입혀 준 역사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다. 이봉창 의거를 통해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하이에 왔습니다."
- 『백범일지』
1932년 1월 8일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 전 세계에 한국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약소민족에게도 힘을 준 사건이 일본 수도 한복판에서 발생했다.
대한독립지사 이봉창 선생이 일왕 히로히토를 향해 폭탄을 던진 것이었다. 일제의 억압에 억눌린 한국인이라면 누구도 꿈꾸어보았을 법한 일인데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이 의사가 거행한 것이었다.
"왜황을 도살하기는 극히 용이한데 하고(何故, 무슨 까닭)로 독립운동자들이 이것을 실행하지 아니합니까“
이 이야기를 듣고 임정요인들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일제에 주눅이 들어 이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도 실천에 옮기지 못했던 일을 이 의사는 실행에 옮겼고, 천추만세에 빛나는 이름이 되었다.
나는 일왕을 죽이는 일을 결코 이봉창 한 사람이 멋대로 벌이는 난폭이 아니라 조선 민족이 전반적으로 독립을 희망하고 있기 때문에 그 민족을 대표하여 첫 번째 희생자로서의 결행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 이봉창 제7회 신문조서 중에서, 1932.2.13
이 의사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10세 전후에는 부유한 집안이었으나 나라가 쇠망하면서 집안도 기울어졌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약방에서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어를 배웠고, 1919년에 용산역의 임시인부로 취직했다.
이 의사는 일본인들이 조선인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능숙한 일본어를 구사했다. 그러다 이 의사가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계기가 있었다. 일본에 있었을 때, 순수하게 일왕 즉위식을 구경하러 간 것인데, 한글로 된 편지를 소지했다는 이유로 9일간 유치장에 구금당한 것이었다. 편지에는 특별한 내용이 없었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대우 받은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되었다.
"남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게 되었고, 따라서 사상도 저절로 변해... 누군가가 이끌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들어갈 기분이었다. 자신은 조선인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조선의 독립운동에 몸을 던져 우리 2천만 동포의 자주권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마음먹었다."
이 의사는 상해임시정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하고 상해로 갔다. 그러나 일본에 오래 있으면서 몸에 밴 습관과 능숙한 일본어로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오해를 받는다. 이 의사를 품어 준 사람은 김구였다. 김구는 당시 임시정부에서 추진한 한인애국단 단장이었다. 이 의사가 단순한 건달이 아님을 간파한 김구는 이 의사의 독립의지에 감명을 받는다.
거사 준비에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상해에 있을 때도 일본인 양복점에서 일하며 일본의 총영사관도 드나들며 철저하게 일본인처럼 행동했다. 거사를 치르러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탈 때 영사관의 경찰이 마중 나올 정도였다.
그 밤을 같이 자고, 이튿날 아침에 나는 내 헌옷 주머니 속에 돈뭉치를 내어 이봉창 선생에게 주며 일본 갈 준비를 다하여 놓고 다시 오라 하고 서로 작별하였다. 이틀 후에 그가 찾아왔기로 중흥여사에서 마지막 한 밤을 둘이 함께 잤다. 그때에 이씨는 이런 말을 하였다.
"일전에 선생님이 내게 돈뭉치를 주실 때에 나는 눈물이 났습니다. 나를 어떤 놈을 믿으시고 이렇게 큰 돈을 내게 주시나 하고, 내가 이 돈을 떼어 먹기로, 법조계 밖에는 한 걸음도 못 나오시는 선생님이 나를 어찌할 수 있습니까. 나는 평생에 이처럼 신임을 받아 본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처음이요, 또 마지막입니다. 참으로 선생님이 하시는 일은 영웅의 도량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백범일지』 중
이 의사는 몸에 수류탄 2개를 지니고 1931년 12월 17일 일본으로 건너 가 이듬해 1월 8일 일왕이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관병식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얻고 거행 날짜로 잡았다.
선생은 히로히토를 겨냥하여 사쿠라다문(櫻田門)에서 수류탄을 던졌다. 한 발은 터져서 말이 다치고 궁내대신 마차가 뒤집어졌다. 일왕 히로히토도 정신을 잃고 땅에 덜어졌으나 다치지 않았고, 수류탄 두 발 중 한 발은 터지지 않았다.
거사는 실패로 끝났지만 이 의사가 상해임시정부 및 독립운동사에 끼친 영향으로 볼 때 결코 실패한 의거가 아니었다. 나라를 빼앗겨 타지를 전전하며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은 청산리전투 이후에 크게 힘을 써보지도 못하고 투쟁노선 차이로 내부 다툼까지 심화되며 침체 기로에 있었다. 이 의사의 의거와 같은 해 4월에 벌어진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중국 장제스 정부의 지원을 받게 되며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은 새 활로를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의사의 유해는 독립 후에 1946년에 송환되어서 효창 공원에 안장되었다. 이 의사 기념관이 효창공원역 근처에 있다.
현재 한국의 사학계는 실증사학이라는 명분하에 일본이 일제시대 때 조작하고 가르친 역사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민의 정신이 고강해야 나라도 건강하고 발전한다. 국민의 정신을 고강하게 하는 데 여러 요소가 있겠지만 자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만큼 중요한 것이 있겠는가? 없는 역사를 만들어서 가르쳐도 안 되지만, 있는 역사를 축소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이 의사처럼 잘못된 현실에 분개하여 분연히 일어설 역사광복군이 필요하다.
월간 대한사랑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 대한민국의 비상에 작은 불쏘시개라도 되고 싶은 심정으로 창간이 되었다. 이 월간지가 문화운동을 통해 한국인의 기상을 바로 세우고, 한국인의 역사의식 개벽에 선봉장이 되기를 기원한다.
<월간 대한사랑> 2024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