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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사건들
3.1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사건들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병탄을 당하고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불가능한 일이 벌어졌다. 이미 한 나라의 식민지가 되어 버린 나라가 다른 것도 아닌 ’독립’을 외친 것이다. 즉흥적 발상이라고는 그 규모가 너무나 컸고, 그 이후 전개되는 양상 역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독립만세운동, 3.1운동에 대해 알아본다.
을사늑약(한·일 제2차 협약)
우리나라가 국권을 빼앗겼다고 실감한 것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다. 외교권 박탈을 명시한 을사늑약은 대한제국이 사실상 주권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백성들은 울분을 토했고, 이 부당함을 바로잡으려 했다.
이 을사늑약은 고종의 인장이 없어 무효논란이 일었다. 프랑스 공법학자 레이는 <국제공법 1906년 2월호>에서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였다. 고종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열흘 후, 헐버트를 통해 을사늑약이 무효라는 긴급 전문을 워싱턴으로 보냈다. ‘대한독립’은 우리가 외교권을 일본에게 양도한 적이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국제연맹은 1935년 조약법에 관한 보고서를 내면서 역사상 효력이 없는 조약 3개 중 하나로 을사늑약을 꼽았다. 국제연맹의 이 보고서는 1963년 유엔 국제법위원회(ILC)의 “강제나 협박에 의한 조약의 비존 승인 수용 등은 무효”라는 보고서로 계승되었다. 을사늑약의 무효화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이 문제가 독도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을사늑약이 무효화가 되면 일본은 독도를 불법 편입한 것으로 된다.
민영환의 자결 항거
슬프다! 국가의 치욕과 인민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경쟁 속에 모두 멸망하게 되었다...
한번 죽음으로써 황은에 보답하고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사죄하노라...
우리 동포 형제들은 더욱 더 분발하고 힘을 써서 그대들의 뜻과 기개를 굳건히 하여 학문에 힘쓰고, 마음으로 단결하고 힘을 합쳐서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자가 마땅히 땅 속에서 기뻐 웃을 것이다.
슬프다! 그러나 조금도 실망하지 마라.
민영환을 비롯하여 조병세, 송병선 등 많은 지사들이 죽음으로 을사늑약에 항거했다. 민영환의 자결은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에 보도되면서 조약 체결 반대 투쟁이 각계각층에서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을사오적 암살단
●기산도(奇山度)와 암살단
호남의 유학자인 기산도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에 이기, 박인호 등 11명과 함께 자강회를 만들고, 을사오적(이완용, 이근택, 박제순, 이지용. 권중현)을 제거하기로 했다. 그는 “우리가 역적을 죽여 사람들의 마음을 격동시키고, 국내 청년들에게 용기를 복돋우면 민족이 다시 일어날 기반을 세울 것이다.”라고 하여 암살의 목적을 밝혔다. 조소앙 선생은 이 암살단을 한말 암살당의 원조로 보았다. 후에 기산도는 오적 중 한 명인 이근택의 집을 습격해서 상해를 입히는데 성공했다. 5년의 옥고를 치른 뒤 반신불수가 된 몸을 추스르며 떠돌이로 살다가, ‘유리언걸지사(流離焉乞之士: 떠돌이 거지지사) 기산도지묘(奇山度之墓)’란 나무 비 하나만 세워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나철과 대종교
홍암 나철은 1863년 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서 태어났다. 유학자 집안 출신인 그는 서울로 올라와 당시 외무대신이었던 김윤식의 문인이 되었다. 이후 홍암은 1891년 과거에 급제해 승정원 가주서, 병조정랑, 승문원 부정자 등 정부요직을 거쳤다. 스승이었던 김윤식이 제주도에 유배를 가게 되자 그를 봉양하며 모셨는데, 이때 스승이 닦아놓은 국내외 인맥을 그대로 소개 받았고, 온건개화사상과 외교독립론을 배웠다. 1902년 다시 서울로 올라온 홍암은 개혁성향의 유교지식인과 일본 유학생 출신들을 많이 사귀게 되었다. 오기호, 이기, 홍필주, 이건, 정운복, 김인식, 이회영 등 향후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교류하였다. 이런 기반위에 1904년 유신회라는 민족운동단체를 만들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홍암은 본인이 배운 바대로 외교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일본에 가서 유력인사들을 만났지만 허사가 되었다. 1907년 홍암은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였다. 정신을 개조하여 새로운 사상과 사업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들이 먼저 시작한 것은 을사오적을 암살하는 것이었다. 매국대신 1명당 3명의 결사대를 배치하는 등 치밀한 암살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권중현을 기다렸던 결사대만이 실행에 옮기게 되고, 이마저도 부상을 입히는데 그치고 말았다.
이런 홍암이 대종교라는 종교를 통해 구국운동에 나선 건 백전노인에게 건네 받았던 『삼일신고』 와 『신사기』의 영향이 컸을 듯하다. 『삼일신고』는 총 5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장 허공(虛空), 2장 일신(一神), 3장 천궁(天宮), 제4장 세계(世界), 제5장 인물(人物) 편으로 이루어져 우리민족 사상의 핵심을 알 수 있게 되어있다. 홍암은 1909년 1월 15일 중광절이라는 이름으로 단군교를 선포했다. 일제의 종교철폐령이 떨어지자 1916년 8월 15일 폐식법으로 자결하였다.
●이기와 단학회
해학 이기는 1848년 전북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에서 태어났다. 12~13세경에 칠서를 읽었고, 15세 향시에 나아가면서 뛰어난 재주와 명성이 여러 고을에 알려졌다. 성리학 외에도 천문, 지리, 음양, 복책, 병복 등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였다. 석정 이정직, 매천 황현과 함께 호남 3재라 일컬어졌다. 1894년 동학혁명 때 해학은 직접 전봉준을 찾아가 서울로 올라가 민씨 일당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하자는 적극적인 제안을 하기도 했다.
을사늑약 후 해학은 1906년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대한자강회 월보>를 발행해 국민 계몽에 앞장섰는데, 편집위원으로 장지연, 윤효정, 정운복, 이기, 현은, 양홍묵, 여병현, 남궁훈, 임병환, 박은식을 두었다.
해학은 단군교 중광식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평소 나철 선생과 삼신설(三神說)의 정의, 신시개천, 단군건원 등에서는 의견통일을 못하여 1909년 3월 16일 단학회를 만들었다. 두 달이 조금 지난 1909년 7월 13일에 이기 선생은 나라를 뺏긴 것에 분개하여 절식으로 삶을 마감했다.
대종교와 단학회에서 볼 수 있듯이, 대한의 독립운동은 철저한 역사와 사상 바탕위에서 시작되었다. 자신의 뿌리를 바로 세워 온 민족이 하나가 될 수 있는 토양을 갖추고자 했다.
1910년대 주요 독립운동과 단체들
단학회의 제천혈맹
1대 단학회 회장이던 이기 선생을 이어 2대 단학회 회장이 된 계연수 선생은 1911년 『환단고기』 30권을 발간하여 독립운동 사상적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단학회는 1914년 이후 2차례 제천혈맹을 거행했는데, 1914년 3월 16일에 단해 이관집, 석천 최시흥, 송암 오동진, 백하 김효운, 벽산, 이덕수, 일봉 박응백, 창춘 양승우, 직송 이용담, 국은 이태집, 녹수 서청산, 백주 백형규 등 12선인과 더불어 삭주 천마산 성인당에 모여 삼신의 주벽하에 삼조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1915년 두 번째 제천혈맹 때는 백암 홍범도 장군과 석주 이상룡 선생이 벽산 이덕수의 소개로 참가를 했고, 그 해 10월 개천절에 박응룡, 정창화, 박용담, 김병주, 이용준, 이봉우, 허기호, 신찬정, 이양보, 주상옥, 이동규, 김석규, 손영린, 이진무 등 14명이 추가되어 단학회 회원이 5만여 명에 달했다.
대동단결선언
1916년 8월 15일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나철이 순국하였다. 민영환의 자결이 민중을 움직인 것과 마찬가지로 나철의 자결은 대종교인들을 움직이게 했다. 그리고 이듬해 대동단결선언이 나왔다. 신규식, 조소앙, 신석우, 박용만, 한진교, 홍위, 박은식, 신채호, 윤세복, 조성환, 박기준, 신빈, 김규식, 이용혁 등 대종교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대한제국을 이은 대한민국의 싹을 틔운 것이다.
1910년대(한국병탄 이후) 설립된 독립운동단체
지역 | 연도 | 명칭 | 위치 | 내용 |
만주 | 1911년 | 경학사 | 삼원보 추가가 | 서간도 한인자치단체 |
1911년 | 신흥강습소 | 광하 합니하 | 경학사 부설기관, 군사교육(신흥무관학교 전신) | |
1911년 | 동창학교 | 만주 환인현 | 대종교가 세운 민족학교 | |
1912년 | 부민단 | 광하 합니하 | 서간도 한인자치단체(경학사 계승) | |
1913년 | 간민회 | 명동촌 | 북간도 한인자치단체(간민교육회가 모체) | |
1914년 | 백서농장 | 팔리초 소배차 | 부민단과 신흥학우단(1913년 신흥강습소 재학생과 학생들로 구성)이 만든 군영 | |
1915년 | 배달의숙 | 관전현 홍석납자 | 단학회가 세운 민족학교 | |
연해주 | 1911년 | 권업회 | 블라디보스토크 | 연해주 한인자치단체 |
1913년 | 대전학교 | 블라디보스토크 | 권업회가 광복군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사관학교 | |
1914년 | 대한광복군 정부 | 블라디보스토크 | 망명정부(군정부) | |
1917년 | 전로한족중앙회 | 우수리리스크 | 1914년 권업회가 러시아에 의해 강제 해산당한 후 세운 러시아 한인자치단체 | |
상하이 | 1912년 | 동제사 | 상하이 | 신규식이 중심이 되어 세운 청년단체 |
1912년 | 박달학원 | 상하이 | 독립운동을 담당할 청년들의 유학예비교육학교 | |
1918년 | 신한청년당 | 상하이 | 제1차 세계대전 후 외교를 통한 독립을 성취하기 위해 결성된 청년단체 | |
미주 | 1914년 | 조선국민군단 | 하와이 오하우섬 | 박용만이 조직한 군사교육단체 |
국내 | 1912년 | 독립의군부 | 서울 | 고종황제의 명을 받아 형성된 비밀단체 |
1915년 | 대한광복회 | 대구 | 자금 모집과 관공서 습격 및 친일 부호 처단 등을 목표로 결성 | |
1917년 | 조선국민회 | 평양 | 기독청년 학생 항일 비밀결사조직 |
대동단결선언서의 의의
융희황제가 토지, 인민, 정치[3보]를 포기한 8월 29일은 즉 우리 동지가 삼보를 계승한 8월 29일이니, 그 간에 한순간도 숨을 멈춘 적이 없음이라. 우리 동지는 완전한 상속자니 저 황제권 소멸의 때가 곧 민권 발생의 때요, 구한국 최후의 날은 곧 신한국 최초의 날이니 … 고로 경술년 융희황제의 주권포기는 즉 우리 국민 동지에 대한 묵시적 선위니 우리 동지는 당연히 삼보를 계승하여 통치할 특권이 있고, 또 대통을 상속할 의무가 있도다.
1917년 조소앙 박은식 신채호 등 14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의한 선언문이다. 주권의 의무와 권리가 국민에게 있음을 밝힌 대동단결선언은 임시정부 수립을 제의함으로써, 당시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조직을 통합하고 독립운동의 이론을 정립했다. 대동단결선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대한제국의 주권은 일본에게 전해지지 않고, 대한제국의 국민들, 즉 백성들에게 전해졌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씨앗이 발아하였다.
1919년 독립 선언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서거했다. 비통한 심정은 비단 일부 선각들만이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이에 민초들이 움직였다. 3월 3일 인산일을 앞두고 대한의 백성들은 한 가지 목표로 대동단결하기 시작했다.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과 신성한 평등복리로 우리 자손 여민(黎民: 백성)에 대대로 전하게 하기 위하여, 여기 이민족 전제의 학대와 억압을 해탈하고 대한 민주의 자립을 선포하노라. …
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 형제자매여! 국민본령(國民本領)을 자각한 독립임을 기억할 것이며, 동양평화를 보장하고 인류평등을 실시하기 위한 자립인 것을 명심할 것이며, 황천의 명령을 크게 받들어(祇奉) 일절(一切) 사망(邪網)에서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
1919년 2월 만주 지린에서 39명의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독립을 선언했다. 대종교, 기독교, 천주교(간도·미주), 사회주의 인사 등 해외에서 활동 중인 독립운동가들이 하나가 되었다. 이것은 2.8 독립선언과 3.1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2.8 독립선언
무오독립선언 후 국제정세에 밝았던 조소앙은 일본 유학시절의 경험을 살려 일본 도쿄로 건너가 유학생인 백관수, 이광수 등을 지도하여 독립선언을 하도록 하였다. 선언서 첫머리에는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이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쟁취한 세계만국 앞에 독립을 기필코 이루기를 선언하노라.”라고 독립의 의지를 밝히고 있다.
어느새 성장해 있던 국민들의 의식
조선 사람들의 의식이 크게 깨어난 해는 1894년이다. 동학혁명 당시 동학군들이 정부에 제시한 폐정개혁안의 주 골자는 반외세 반봉건으로서 평등한 사회의 건설이었다. 3.1운동이 거족적인 항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느새 성장해버린 민중들의 각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탄생한 신해혁명, 제정러시아가 무너지고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선 러시아혁명, 그리고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후 우드로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 같은 변화하는 국제정세가 배경을 이루었지만, 백성들의 각성이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기미독립선언
2.8 독립선언서 작성 이후 예관 신규식은 동제사 요원들로서 곽경, 선우혁 등을 국내의 손병희, 이승훈 등에게 밀파하여 3월 1일 독립혁명의 거사에 참여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렇게 해서 천도교, 기독교, 불교, 보천교 등 국내의 모든 종교계가 합심하여 독립선언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그들의 목표는 평화적 선언이었기 때문에 소요상태를 염려하여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했다. 정작 탑골공원 팔각정 단상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사람은 당시 학생이었던 정재용 군이었다. 격앙된 수천 명의 학생과 군중들은 만세를 외치며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은 약 3개월 동안 전국에서 전개되었다. 서울에서 3.1운동을 기획하던 인물들이 독립선언서를 각 지역으로 보내왔을 뿐만 아니라, 서울과 평양의 만세운동을 목격한 사람들이 그 열기를 고향에 전하면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