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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이 올라가네
『국어독립만세』(김철호)에서 우리말이 서양, 특히 영어의 문법으로써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다고 밝히면서 든 예이다. 영어에서는 사물이 능동적 행위의 주어가 될 수 없다. 사물을 앞에 내세울 경우 문장은 거의 수동태로 기술된다. 그들의 로고스로써는 아니, 사물인 건물이 올라가? 이해가 안 되거나 올바른 문장이 아니다. 여기서 ‘올바름’은 철저히 서양의 문법과 로고스 기준이다. 그러나 우리는 밥이 목구멍에 들어가고 식탁에 김이 올라오고 화살은 날아간다.
우리말과 영어, 그리고 두 언어를 지은 혹은 두 언어가 낳은 각 정신과 영혼은 매우 다를 수밖에 없다. 영어는 주체(명사) 중심이다. 그러다보니 명사를 꾸며주는 관사, 형용사가 풍부하다. 나, 너, 그 사람, 그것 등의 지시대명사도 다양하다. 또 성性[남성, 여성, 중성], 수數[단수, 복수], 격格[주격, 목적격 등]의 구별이 엄격하다. 모든 명사는 성이 정해져 있다. 독일어는 성에 따라 관사가 아예 정해져 있다. 정관사의 경우 남성, 여성, 중성의 1격(주격) 형태가 각각 ‘der’, die’, ‘das’이다. 이를테면 꽃은 -꽃의 뜻과 상관없이- 여성형으로 규정된다. 그래서 정관사를 써서 표현하면 ‘die Blume’(디 블루메)이다. 심지어 ‘하느님’도 ‘그 남자’이다.
또 주격, 목적격의 구별이 철저하다. 이런 문법의 바탕에는 세상의 명사적인 모든 것들은 주체이거나 객관으로 나뉜다는 주객이분의 사고방식이 놓여있다. 우리말 동사는 ‘누가’, ‘무엇을’ 굳이 분별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쓰인다. 목적어를 나타내는 목적격 조사 ‘을’, ‘를’도 빠지기 일쑤이다. 이 밖에도 영어에서 특징적인 것은 소유격의 발달이다. 영어에서는 ‘나의’ 등의 소유격이 문장에서 명시되지 않으면 혼란에 빠진다. 그들로서는 주어와 대상이 분명해야 하고 소유의 주체도 확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양의 ‘사랑해’(I love you)란 표현도 따지고 보면 다소 무안할 정도이다. ‘내’가 사랑의 주체이고 ‘너’는 그 행위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데. 객체인 ‘너’의 마음은? 우리는 영어 표현을 닮으려고 일부러 그러지 않는 한, ‘사랑해’이다. 여기에는 사랑의 주객이 똑 부러지게 갈리지 않는다. 사랑 안에서 그런 구별을 굳이 찾지 않는 것이다.
서양이 명사 중심인 데 비해 우리말은 ‘사랑해’처럼 동사 중심이다. 그래서 동사를 꾸미는 부사가 엄청 많고 문장에서 동사가 뒤에 나온다. 맨 나중에 들리는 말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명사가 분별 중심으로 쓰인다면 동사는 상관되는 것들이 서로 침투하고 관계 맺고 속하며 일어나는 활동, 변화의 사건을 나타낸다.
‘보여지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사물을 주어로 제시할 경우 영어의 수동태를 의식하며 쓰고 있는 표현인 듯하다. ‘~이 보여지다.’ 여기에는 내가 오직 ‘보는’ 자이고 사물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보여지는’ 객체라는 사고방식이 알게 모르게 작용하게 된다. 우리말에는 이 경우에 사용하는 피동사 ‘보이다’가 있다. 그런데 ‘보이다’는 단순히 수동성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의 편에서 인간의 봄에 스스로를 내보이는 능동의 성격 또한 담겨 있다. 그래서 ‘피동사’란 용어마저 부적합한 것인지 모르겠다. 달리 말하면 그만큼 우리말 ‘보다’에서는 주어와 대상, 능동과 수동, 타동과 자동의 구별이 기를 쓰고 따져야 할 심각할 일이 아니다. 얽히고 되먹이면서 서로의 경계가 ‘불확정적’이다. 혹은 ‘봄’ 안에서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일체라는 생각이 더 녹아들어 있다. 다행히 아직까지 우리말 표기법은 ‘보여지다’를 잘못된 표현으로 규정하고 있다.
인간과 사물, 남성과 여성, 능동과 수동, 앞섬[先]과 뒤섬[後], 주관과 객관 등. 도대체 왜 그렇게 나누고 따지는데? 그리고 누가, 무엇이 인간에게 그럴 권리를 허락했는가?
건물이 올라가네! 어디, 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