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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전반기에 고구려가 중국의 영토를 뺏었는가? (소위 낙랑군 교치설은 근거가 있는가?)
조선총독부를 승계한 강단은 4세기 전반기에, 평양에 있던 낙랑군과 황해도에 있던 대방군을 고구려가 차지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하는 말로는 낙랑군과 대방군의 교치이다.
조선총독부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대동강 남쪽과 황해도에 가져다 놓았는데, 그것이 계속 유지되는 경우 뒤의 역사와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없애야 했다. 그래서 찾다찾다 찾은 근거가 삼국사기 313년 10월 미천왕의 낙랑군 공격 기사, 314년 9월의 대방군 공격 기사, 313년 4월 이전 어느 시점이라 기술된 자치통감 장통의 모용외로의 귀부 기사이다. 그런데 장통의 귀부가 미천왕의 공격보다 더 이른 시기여서 말이 맞지 않는다. 또 삼국사기의 기사는 점령 기사가 아니고 공격 기사이며 포로를 잡아 귀환했음을 명시하고 있다. 자치통감도 장통과 고구려가 싸워 서로 공격하면서 해가 바뀌어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즉 장통이 근거지를 버리고 도망갈 정도로 패배한 상황이었다는 것은 어느 사료에도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고구려가 낙랑군을 북쪽에서 공격하는데, 장통이 민가 천여호를 이끌고 대동강을 건너 고구려 영토를 지나 도망친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자 조선총독부의 교시를 지키려는 강단은 313년을 4세기 전반이라고 말을 바꾸면서 사서의 기록이 구체적으로 명확하지는 않지만, 4세기 전반기에 낙랑군과 대방군이 한반도에서 사라진 것은 맞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4세기 전반은 고구려가 중국으로부터 영토를 탈취하여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이 절대 아니다. 미천왕이 313년부터 315년까지 낙랑 대방 현도군을 공격하였지만, 319년에는 모용외가 공격하자 고구려가 화해를 청하였고, 320년에는 고구려가 요동군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고, 331년 이후 고국원왕 시에는 일방적으로 전연에게 당하고 있다. 339년 모용황이 신성을 침공하자 화해를 요청하였고, 342년에는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되어 미천왕의 시신과 왕비 및 왕모 주씨, 그 외 5만여 명이 인질로 잡혀갔고, 343년 왕의 동생을 보내 사죄하고 겨우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 받았다. 343년에는 전연이 두려워 수도를 옮겼다. 345년에는 남소성을 뺏기고, 349년에는 고구려로 망명한 송황을 전연이 무서워 전연으로 다시 보냈고, 결국 355년 전연에 굴복하며 조공관계를 맺고 왕비와 왕모를 귀국시켰다.
4세기 전반 이전까지, 강단에 의하면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의 산간에 있는 소국이다. 따라서 고구려가 4세기 전반에 갑자기 대동강 남쪽과 황해도 평야지대를 중국으로부터 탈취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서진말 혼란기를 틈타 그렇게 하였더라도 전연이 자기들 땅이었다고 바로 뺏어갔을 상황이다.
낙랑군 대방군의 위치를 어디로 보든지, 서진(한나라와 조위도 마찬가지이다)의 중심지에서 낙랑군까지의 거리는 전연에 비교하여 훨씬 멀다. 전한 후한 사이의 혼란기, 후한 말 삼국의 혼란기에도 중국 왕조의 땅으로 유지되었던 낙랑군을, 고구려를 거의 속국이다시피 만든 전연이 유지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개나 돼지도 속아 넘어가지 않을 거짓말이다.
이러한 황당한 거짓이 횡행하는 곳이 강단이다. 강단의 유일한 목표는 조선총독부 교시의 수호이다. 즉 그들은 그들 자신이 자주 사용하는 용어인 유사사학에 불과하다.
낙랑군은 예맥조선 왕검성의 주민을 한나라의 영토인 하북성 중부 보정시에 이주시키면서 설치되었다. 서진의 유주 평주는 하북성 중부 역수 일대이다. 전연은 수도가 용성이다. 용성은 서진의 유주에 있었고, 서진의 유주 바로 남쪽에 서진의 평주가 있었고 낙랑군은 평주 소속의 군이다. 광개토대왕이 407년 후연을 멸하면서 서진의 유주와 평주는 고구려의 영토로 되었고, 고구려는 이 지역을 481년부터 494년까지 백제 동성왕에게 빼앗긴 것을 제외하고 고구려 멸망 시까지 유지하였다. 낙랑군 평양설과 4세기 전반 고구려 점령설은 조선총독부의 소설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