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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천년사」의 진국과 마한 날조
1. 「전라도 천년사」 관련 부분
ㅇ 총설 15쪽
“중국 사서 『삼국지』 「동이전」에 따르면 고조선 준왕이 정변으로 남하, 한의 왕이 되어 마한을 다스렸으며, 이후 진한 변한이 생겼다고 한다. 준왕이 이동한 지역에 대해 『제왕운기』,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등은 전북 익산 지역으로 보고 있다.”
ㅇ 총설 58~60쪽
남한에는 원래 진국이 있었는데, 준왕이 온 전라북도 지역에서 '한'이란 명칭이 시작되어 마한, 진한, 변한 등 삼한의 명칭으로 확장되었고, 마한은 만경강유역에서 시작하여 경기 충청 전라까지 확장되었다고 함.
ㅇ 선사·고대 2권 54~65쪽
기원전 3~2세기 이른바 한반도 중남부지역에서 점토대토기문화 또는 세형동검문화를 영위하던 세력집단이 진국이라 함. 진국으로 남하한 준왕과 역계경, 예맥조선 멸망 시의 유이민으로 인해 진국이 해체되지만, 그 핵심 세력은 기원전 1세기 초 이전에 중서부지역에 마한과 중부 이남지역에 변한 그리고 소백산맥을 넘어 경상도 지역에 진한을 세운다고 하면서, 현재까지는 이같은 사실을 문헌 기록에서 찾을 수 없다고 함.
ㅇ 선사·고대 2권 109~123쪽, 총설 60~62쪽, 선사·고대 3권 80~103쪽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마한 관련 기사는 후대의 영역 인식이 온조왕 대 기사에 반영된 것이므로 믿을 수 없다고 하며, 진서의 마한 조공 기사로 볼 때 한반도의 마한이 「백제본기」의 기록과 달리 9년에 망하지 않았고, 백제가 점진적으로 흡수하여 6세기 중엽에야 백제가 완전히 지배하게 되었다고 함.
ㅇ 선사·고대 2권 175~192쪽
『삼국지』 마한 55국명과 「일본서기」의 지명이 국명인 마한 소국들이 전라도에 다수 있었다고 함.
2. 「전라도 천년사」의 무근거성
(1) 준왕과 역계경이 간 곳이 같지 않음
① 『삼국유사』는 준왕이 바다를 건너 남으로 갔다고 함.
『위지(魏志)』에 이르기를 “위만이 조선을 치니 조선왕 준(準)이 궁인(宮人)과 좌우(左右)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 남으로 한(韓) 땅에 이르러 나라를 건국하고 이름을 마한(馬韓)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② 『삼국지』 「위서 동이전」 주석으로 인용된 『위략』은 역계경이 동으로 갔다고 함.
일찍이 右渠가 격파되기 전에, 朝鮮相 歷谿卿이 右渠에게 諫하였으나 [그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으로 辰國에 갔다.
③ 「전라도 천년사」는 준왕이 간 곳과 역계경이 간 곳이 모두 진국이라고 하나, 준왕은 남쪽의 한(韓)으로 갔고, 역계경은 동쪽의 진국으로 갔으므로 사실과 다름. 따라서 한반도 남쪽에 진국이 있었고, 진국이 삼한으로 나누어지며 그 중 전라도가 마한이라는 「전라도 천년사」의 주장은 근거가 전혀 없게 됨. 역계경이 간 곳은 예맥조선의 동북쪽에 있었던 북부여임.
④ 「전라도 천년사」는 오직 사서의 금마가 익산이라는 하나의 이유만으로 익산이 마한이라 주장하는 것이 되는데, 지명이 같은 곳이 많이 있었고, 특히 백제는 대륙과 한반도에 영토를 두어 같은 지명이 많이 있었으므로, 익산이 금마였다 하더라도 준왕이 이주한 금마는 한반도의 금마가 아닌 다른 지역의 금마일 수 있음.
(2) 전라도는 마한이 아님.
가. 최치원이 당나라에 보낸 외교문서
① 최치원은 당의 태사 시중에게 신라 사신에 대한 당나라 내에서의 편의 보장을 요구하는 외교문서를 보냈는데, 거기에서 “엎드려 듣건대 동해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한·변한·진한이었습니다. 마한은 곧 고구려, 변한은 곧 백제, 진한은 곧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기에 강한 군사가 백만이나 되어, 남으로는 오(吳) 월(越)을 침공하였고, 북으로는 유(幽), 연(燕), 제(齊), 노(魯)를 어지럽혀 중국의 커다란 해충이 되었습니다”라고 함.
② 신라가 당에게 외교문서에서 허튼 소리를 할 수가 없고, 당대 최고의 학자인 최치원이 근거 없는 말을 할 수 없으며, 고구려 백제가 망한 지 불과 200년이 지난 시점의 말이므로, 최치원의 말은 사료가치가 높음.
③ 최치원의 말을 부인하기 위해선 최치원의 말보다 사료가치가 더 높거나 같은 정도의 사료를 근거로 제시해야 하나 「전라도 천년사」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음.
나. 사료에 나타난 각국의 위치관계 모순 발생
① 「전라도 천년사」는 마한이 백제가 되고, 진한이 신라가 되고, 변한이 가야가 되며, 마한은 한반도 서남부, 진한과 변한은 경상도라 하는데, 이 경우 『삼국사기』와 『삼국지』와 모순이 발생함.
② 『삼국사기』와의 모순
ㅇ 온조왕이 백제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고 함.
- 한강이 온조왕의 백제라면 백제 동쪽에는 낙랑이 없고, 북쪽에는 말갈이 없음.
- 「전라도 천년사」를 쓴 소위 강단사학자들은 아무 근거 없이, 춘천에 맥국이 있었고, 이들이 낙랑을 참칭했고 온조왕은 참칭하는 것도 모르고 맥국을 낙랑이라 말했다 하며, 백제 북쪽의 말갈에 대해선 동예설, 고구려 내 말갈설, 영서예설, 마한의 소국인 신분고국설 등을 주장함.
- 맥국은 고구려를 지칭하는 말이고, 소위 강단사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백제 북쪽은 대방군 낙랑군이므로, 예나 말갈이나 마한이 있을 수 없으므로 준왕이 남하한 마한이 전라도라 하기 어려움.
ㅇ 신라는 서기전 28년, 서기 4년, 서기 14년, 서기 36년 낙랑군의 공격을 받음.
- 소위 강단사학자들의 주장에 의해 낙랑군이 평양이고, 낙랑 동부도위가 함경도이면, 낙랑과 경주 사이를 낙랑군이 점령하지 않는 한 신라가 낙랑군의 공격을 받을 이유가 없음.
- 소위 강단사학자들은 날조기사설, 상인집단설, 북진한설, 시기 혼동설, 낙랑 참칭 옥저설, 최리 낙랑국설, 편찬자 실수설 등을 주장하나 모두 근거는 없음.
- 무려 4차례의 침략이 기록되어 있어 신라를 침략한 세력은 낙랑군이나 낙랑군 동부도위 아닌 다른 세력이라 볼 수는 없으므로, 삼한 중 진한을 경상도에 위치시키는 「전라도 천년사」의 위치 비정은 오류임.
③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조와의 모순
ㅇ 공손강은 군대를 일으켜 倭와 韓을 공격하여 帶方에 복속시켰고, 245년경 조위는 공손씨를 멸하고, 공손씨에게 복속되어 있었던 辰韓 팔국을 낙랑군에 귀속시키려 하였는데 이들이 거부하자, 진한 팔국을 멸함.
ㅇ 진한이 경상도이면 공손씨는 경상도를 대방군에 편입하였고, 조위는 경상도를 멸하고 영토로 만들었어야 하며, 경상도에 왜가 있어야 함.
ㅇ 『삼국지』에 의하면 왜와 진한이 낙랑 대방군과 이웃한 곳이어야 하므로, 「전라도 천년사」의 위치 비정은 오류임.
④ 「전라도 천년사」의 마한 등 삼한 위치 비정은 사서의 기록과 모순되어 타당할 수 없음에도, 아무런 해명 없이 전라도가 마한이라는 가정하에 전라도사를 기술하여 전라도사를 날조하고 있음.
(3) 근거 없이 『삼국사기』를 사료로 인정하지 않음
① 변한은 서기전 39년에 신라와 병합하여 신라로 됨에도, 「전라도 천년사」에서는 변한이 서기전 39년 이후에도 계속하여 등장함.
② 마한은 백제가 서기 8년부터 공격하여 서기 9년에 멸망시킴
ㅇ 온조왕 26년(서기 8년)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을 간다고 말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마침내 그 국읍(國邑)을 병합하였다. 오직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 두 성만은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ㅇ 온조왕 27년(서기 9년) 여름 4월에 두 성{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이 항복하였다. 그 백성들을 한산(漢山)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이 드디어 멸망하였다.
③ 「전라도 천년사」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마한 관련 기사는 후대의 영역 인식이 온조왕 대 기사에 반영된 것이므로 믿을 수 없다고 함.
- 불신의 유일한 근거는 『진서』의 마한 조공 기사임
- 『진서』 「동이열전」은 고구려와 백제가 없고, 마한 진한은 조공 기사 외에는 관련 기사가 없고, 특히 마한의 경우 조공한 해가 순서대로 기재되어 있지 않아 신빙성이 없음.
- 『진서』의 마한 조공기사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중국 사서는 말갈을 마한으로 기재한 경우가 있으므로, 고구려의 소국인 말갈을 마한이라 기재하였을 가능성이 큼. 『후한서』 권5 효안제기 제5 연광(延光) 원년(122) 2월조에 “부여왕이 병사를 파견하여 현도를 구하고 고구려 마한 예맥을 격퇴하고 마침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라 하여 마한이라 하였는데, 이 기사에서 마한은 고구려 내의 소국인 말갈이 분명함, 김부식도 『후한서』에 맞추어 121년과 122년의 고구려와 후한 전쟁의 참가자를 마한으로 표기하였음. 「전라도 천년사」에 의하면 백제 남쪽에 있는 마한이 현도군과 고구려의 전쟁에 참가하는 것은 불가능함.
- 『진서』의 진한 조공기사가 사실이라면, 진한은 조위에 복속되어 중국의 영토가 된 진한팔국을 의미할 것임.
④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에 망하는 마한은 국읍이 있고, 마지막까지 저항한 마한의 일부는 마한의 소국들이 아니라, 마한의 두 성임. 따라서 서기 9년에 망하는 마한은 소국들의 연합이 아닌 고대국가임에도 「전라도 천년사」는 마한이 여러 소국이라고 주장.
(4) 삼한 70여국설 검토
가. 진수와 범엽의 삼한 이해
① 진수와 범엽은 낙랑·대방군의 韓·倭 침략과 관구검의 고구려 침략 시 획득한 사료와 침략군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에 관해 쓸 수 있게 되었는데, 이들은 우리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으므로 약탈한 사료를 잘못 해석함.
② 우리 역사에서 삼한은, 진한의 목지국에서 단군이 삼한 전체를 다스리는 단군조선(삼한조선=전삼한)과, 준왕이 도망 간 韓 지역(황하 동쪽 제수 북쪽)의 마한이 소국인 진한 변한의 우위에 있는 후삼한이 있음. 진수와 범엽은 탈취한 역사서에 나오는 전삼한과 후삼한의 이야기를 혼동하여 삼한이 한 번 있었다고 생각하여 전삼한과 후삼한의 사실을 뭉뚱그려 기술함. 즉 『삼국지』와 『후한서』에서 전삼한과 후삼한을 분리하여야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 수 있음.
나. 『삼국지』와 『후한서』 삼한 기술의 모순성
① 『삼국지』의 모호성
ㅇ 처음에는 韓은 馬韓 辰韓 弁韓이고 방4천리인데, 辰韓은 옛 辰國이라 하지만, 馬韓 辰韓을 설명한 다음에는, 별다른 설명도 없이 弁韓이라 하지 않고, 弁辰이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 3韓 중 辰韓과 弁韓이 있기 때문에 弁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위해선 반드시 설명이 필요한데 모호하게 기술.
ㅇ 진수는 마한 55국을 열거하고 辰王이 月支國을 통치했다고 함. 辰韓은 6국이었는데 12국으로 나뉘었다고 함. 弁辰은 24국인데 그 중 12국은 辰王에 臣屬되어 있는데, 辰王은 항상 馬韓사람으로 王을 삼아 대대로 세습하였으며, 辰王이 자립하여 王이 되지는 못하였다고 함.
ㅇ 弁辰을 설명하면서 弁韓과 辰韓의 합계가 24國이나 된다고 하면서도 23국만 열거함. 24국 중 辰王에 속한 12국이 辰韓 12국인지 아닌지도 불분명. 진수가 열거한 弁辰의 국가는 24국이 아니라 23국이며 弁辰이 앞에 붙는 국가는 12국이고, 弁辰이 앞에 없는 국가는 11국임.
ㅇ 月支國을 통치했다는 辰王과 弁辰을 기술할 때 나오는 辰王은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辰王에게 弁辰 24국 중 12국이 속해 있다는 것과 月支國 통치자로서의 辰王과 연결고리가 없음.
② 『후한서』의 모호성
ㅇ 삼한은 馬韓 辰韓과 弁辰이라고 함.
ㅇ 범엽은 馬韓은 54國이고 辰韓과 弁辰은 각각 12國이라 하면서 국명은 열거하지 않음.
ㅇ 범엽은 삼한이 전체 국토의 넓이가 방 4천여리나 되며, 모두 옛 辰國이라고 하면서,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王을 세워 辰王으로 삼아 目支國에 도읍하여 전체 三韓 지역의 王으로 군림하고, 三韓의 諸國王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이라고 하는데, 왜 마한이 가장 강대하면서 왕의 이름을 馬王이 아닌 辰王으로 하는지가 설명되어 있지 않음. 辰韓이 없다면 辰王으로 이름지을 수 있으나, 辰韓이 옆에 있는데 왕의 이름을 辰王으로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임.
③ 진수와 범엽간 차이
둘은 같은 사료를 본 것으로 추측되는데, 삼한의 명칭, 삼한의 각 국가 수, 진왕의 지위나 진국의 의미에 대해 둘 사이 차이가 있음.
다. 전삼한과 후삼한의 분리.
① 전삼한
ㅇ 馬韓 54국, 辰韓과 弁韓 각 12국은 전삼한의 나라 수임. 목지국은 진한(삼한의 천자)이 직접 다스리는 나라임. 방 사천리의 나라로, 진한은 요서와 중국 북부이고, 마한은 요동과 한반도이고, 변한은 중국 동부임.
ㅇ 삼한이 모두 辰國이며 辰韓이 가장 강대하였고, 辰韓의 目支國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의 왕으로 군림하였고, 삼한의 제국왕의 선대는 모두 진한인임. 즉 마한 번한왕은 제후왕으로 항상 辰韓사람으로 왕을 삼았고, 세습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자립하여 왕이 되지는 못함
ㅇ 진한을 부를 때 辰國이라 하기도 함. 조선의 천자국을 일반적으로 辰國으로 호칭.
② 후삼한
ㅇ 辰韓은 여섯 마을이 결합한 나라. 즉 신라임.
ㅇ 진한은 서기전 39년 변한과 결합하여 변진이 됨. 즉 변진은 신라임.
ㅇ 마한, 백제, 신라(변진), 낙랑군, 낙랑군 동부도위, 왜, 말갈이 좁은 지역에서 같이 있을 수 있는 곳은 황하 하류지역 밖에 없음. 황하 동쪽 제수 북쪽이 한이라 불리었고, 후삼한은 한에 있었음. 한은 우리 민족의 강역에서 보면 매우 협소한 지역이지만, 이 지역에서 백제와 신라가 기원하였고, 바로 북쪽에서 고구려가 건국되었고, 중국과의 국경 부근이기 때문에, 사서에 이 지역에 관한 사실들이 주로 쓰여짐.
라. 「전라도 천년사」의 삼한 날조
ㅇ 「전라도 천년사」는, 『삼국지』와 『후한서』를 사료 비평 없이 방사천리의 서기전 24세기의 삼한과, 서기전2세기의 韓 지역의 후삼한으로 분리하지 않고, 양 사서에서 조선총독부의 소설에 필요한 부분만 발췌하여, 서기전 24세기 방사천리의 전삼한을 백제 신라 가야가 있는 한반도 남부에 있는 소국으로 날조하여 백제 신라 가야의 역사를 날조.
ㅇ 「전라도 천년사」는 마한이 서기 9년 백제에 멸망당하여 후삼한이 해소됨에도 불구하고, 근거도 없이 『삼국사기』를 부인하고, 시대가 다른 70여 소국설로 전라도 역사를 날조.
3. 소결
ㅇ 역계경은 간 진국은 북부여이고, 준왕이 간 곳은 예맥조선의 남쪽인 韓 지역이라 입증되므로, 진국과 준왕이 간 곳이 한반도 남부라는 「전라도 천년사」는 우리 역사 날조임.
ㅇ 후삼한의 마한 등 삼한은 韓 지역에 있었으므로 후삼한이 한반도 남부이고 전라도가 마한이라는 「전라도 천년사」는 전라도사 날조임.
ㅇ 마한이 9년에 멸망하며, 삼한 70여 소국은 서기전 24세기의 상황이므로, 한반도 남부에는 삼한의 소국이 아닌 백제 신라 가야가 정립하므로, 마한이 전라도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였다는 「전라도 천년사」는 백제 역사 날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