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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나라 영토(단군조선 영토 변천사)
■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에 한국고대사를 풀 ◐열쇠◐가 숨어있다
※주) 낙랑군과 위만조선, 연나라 장성이 하북성 중부인 석가장시와 형수시 무강현에 있었다고
서기전 91년 완성된 사마천 「사기」와 서기 90년 경에 완성된 「한서지리지」가 신호를 보내고 있다
■ 춘추시대 연燕 제濟 진秦 등 제후국의 봉지는 100리(40km)를 넘지 않았고
고조선 땅을 빼앗기 전에는 100리(40km) 정도가 연燕나라 영토로 추정된다
1) 춘추시대 제 환공: 적인(狄人)이 〔제(齊)를〕 공격하였다. 환공(桓公)이 제후들에게 말하기를, “제를 도와 〔적을〕공격하기 바란다. 제후들이 허락한다면 큰 제후국은 전차 200승(乘)과 병사 2,000인을, 작은 제후국은 전차 100승(乘)과 병사 1,000인을 보내기 바란다.”고 하였다. 제후들이 모두 허락하였다. 제는 수레 1,000승을 〔내보내고〕 병졸은 먼저 연릉(緣陵)으로 보내었는데, 후고(後故)에서 전쟁하여 적을 패퇴시켰다. 〔전리품으로 얻은〕 전차·병기와 재화는 작은 제후국에 주었으며 〔제와〕 가까운 큰 제후국에는 현(縣)을 나누어 주되, 국읍에 들어와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출처] 『管子』 卷第七 大匡 第十八 內言 一 五年諸侯附. 狄人伐.
2) 2세 원년(기원전 209년) 7월, 빈민가 백성들을 징발하여 수자리로(변방으로) 보내
어양(漁陽)을 지키게 하여 900명이 대택향(大澤鄕)에 주둔하게 되었다.
[출처] 48-01/06[史記(사기)세가(世家)] 권48.陳涉世家(진섭세가)(01/06)<진승(陳勝)·오광(吳廣)의 난>
3) 기원전 134년에 주부 언 (主父偃, ? ~ 기원전 125년?)이 황제(한漢무제)에게 권유하여 말했다.
“옛날(춘추전국시대)의 제후들은 봉지가 1백리를 넘지 않았기 때문에 강약의 형세로 통제하기 수월했다"
[출처] 112-6/7[史記列傳(사기열전)]권112.平津侯·主父列傳(평진후주보열전)(6/7)②主父偃(주보언)
※주) 영토는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에 나타나는 제후국들의 주 활동 무대를 중심으로 작성된 내용이다
■ 1. 춘추시대의 주周나라 영토[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425년 ]
1) 춘추 시대 주 제후국들은 북쪽으로 제하濟河(徒骇河), 안양시安陽市,임분시臨汾市 를 넘지못했다
2) 연燕나라 계薊는 하남성 하수河水부근으로 추정된다
3) 조趙나라가 중모中牟(학벽鶴壁 서쪽)에 처음으로 도읍한 년도를 영토관점에서 춘추시대 종료를 보았다
■ 2. 삼진三晉시대의 주周나라 영토[ 기원전 424년 ~ 기원전 296년 ]
1) 진(晉)나라에서 분리되어 나온 조(趙)나라, 위(魏)나라, 한(韓)나라가 삼진三晉이다
2) 중산中山이 멸망한 년도를 영토관점에서 삼진三晉시대 종료로 보았다
3) 연燕나라 계薊가 서기전 697년에 하남성 하수河水부근에서 하북성 거록현으로 이동한 것이다
[출처] 「춘추좌전」 BC697 燕桓侯時被迫遷都臨易以躲避山戎的侵擾 연환후때 산융(山戎)의 침략을 우려하여
임역(臨易)으로 천도하였다.(산융을 피해 북쪽으로 이동했다는 것은 산서성 중부인 장치시와 진성시가 산용이다)
※주) 춘추전국 시대 하河는 황하를 나타내며 하내, 하서, 하동의 하河는 황하이고
산山은 태행산으로 산서, 산동에서 산山이 태행산이니
산융은 태행산의 융, 중산은 태행산 가운데(중中)으로 추정할 수 있다
■ 3. 전국시대의 주周나라 영토[ 기원전 295년 ~ 기원전 221년 ]
1) 진시황이 6국을 병합한 년도를 영토관점에서 전국시대 종료로 보았다
2) 삼진三晉시대에 연장성燕長城과 조장성燕長城을 쌓았고 장성長城이 고조선과 경계가 되었다
■ 4. 진시황의 진秦나라 영토[ 기원전 220년 ~ 기원전 108년 ]
1) 한漢 무제武濟가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한 년도를 영토관점에서 진시황의 진秦나라 종료로 보았다
2) 진시황의 진나라는 전국칠웅의 영토를 병합했다
3) 진秦나라의 만리장성을 고조선과 경계로 보았다
4) 진나라와 고조선과의 동쪽 경계는 제하濟河와 호타하滹沱河로 보았다
※주) 진시황본기에서 동쪽 경계는 동해와 조선에 접한다고 했으니...
섬서성 함양관점에서 제하濟河와 호타하滹沱河 북쪽도 동쪽이다
영토는 동쪽으로 동해와 조선(朝鮮)에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임조(臨洮), 강중(羌中)에까지 이르며, 남쪽으로는 북향호(北嚮戶)에까지 이르고, 북쪽으로 황하를 의지하여 요새를 쌓아 음산(陰山)을 따라 요동(遼東)에까지 이르렀다.
[출처] 06-04[史記(사기) 本紀(본기)] 권06. 秦始皇本紀(진시황본기) (04/20) <秦始皇帝(진시황제)>④
진 시황 26년(기원전 221년), 몽염은 집안 대대로 장수를 지냈기에 진나라 장군이 되어
제나라를 공격해 크게 무찌르고 궁중의 일을 기록하는 내사(內史)로 임명되었다.
진나라가 천하를 병합하자 이에 몽염에게 30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융적(戎狄)을 쫓아내게 하여 황하 남쪽 땅을 점거했다.
장성을 쌓으며 지형에 따라서 험난한 요새를 만들었으며,
서쪽 임조(臨洮)에서 동쪽 요동(遼東)까지 길이가 일만여 리를 뻗어갔다.
황하를 건너 양산(陽山)을 거점으로 하여 구불구불 북쪽으로 이어갔다.
비바람을 맞으며 외지를 10여 년간 전전하다 상군(上郡)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때 몽염의 위세가 흉노(匈奴)에 떨쳤다.
[출처] 88-1/3[史記列傳(사기열전)] 권88 蒙恬列傳(몽염열전) (1/3)
※주) (1) 몽염이 황하 남쪽 땅(장안 북쪽)을 점거 했다고 했으니 섬서성 북쪽에 만리 장성을 새로 쌓은 것이고,
산서성과 하북성은 연장성과 조장성을 수리한 것으로 추정되다
(2) 진시황의 영토는 제나라와 연나라 영토이고, 동쪽으로 동해와 조선에 접한다고 했으니...
섬서성 함양관점에서 에서 보면 제하濟河와 호타하滹沱河 북쪽은 동쪽이다
■ 5. 전한前漢의 영토[ 기원전 107년 ~ 기원후 8년 ]
1) 한漢 무제武濟가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한 년도를 영토관점에서 전한前漢의 시작으로 보았다
2) 한무제 시기( 기원전 128년)에 예薉나라 임금인 남려가 항복해서 창해군을 설치했는데...
예薉가 예맥국穢貊國이며 창해군이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인 창주시滄州市다. 후한 말에 공손강이
예맥국의 일부를 침범하여 대방군을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옛 현도군에 대방군 설치)
※주) 사기 평준서에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니 연(燕), 제(齊) 사이가 바람에 휩쓸리듯 소란'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설치 2년만인 126년에 창해군이 폐지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예맥국이 한나라를 몰아낸 것으로 보인다)
3) 한 무제(漢 武帝) 원삭(元朔) 2년(기원전 127년)에 황하를 따라 방어선을 쳤다는 것은 섬서성 북쪽을 방어한 것이고, 상곡군의 구불구불하고 외진 조양일대의 땅을 포기한 것은 임분시와 운성시를 제외한 산서성 전부를 포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 낙랑군樂浪郡과 최씨 낙랑국樂浪國은 별개가 아닌 같은 지역으로 추정된다
최씨 낙랑국이 위만조선보다 1년 빠른 서기전 195년에 세워졌고, 최씨 낙랑군멸망 뒤에
낙랑군이 삼국사기에 등장하고,위만조선 멸망후에 성이 밝혀지지 않은 재상 노인(路人)의 아들 최(最)가 온양후(溫陽侯)에 봉해졌으니, 재상 노인(路人)이 최씨고 후손이 낙랑국의 왕 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서 지리지에 따르면 한漢나라에서는 현縣에 후국侯國들이 있다)
※ 오환족烏桓族은 중산국中山國(춘추시대에는 산융山戎)의 후손으로 추정되며,
「사마천 사기 」의 전국시대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중산국을 포함한 대代나라의 대代는 '대신할 대'이니...
누군가를 대신하는 나라이니 고조선의 거수국으로 추정된다(거수국渠帥國은 고조선의 제후국이다)
「한서」권6 무제기 창해군 설치
秋, 匈奴入遼西, 殺太守;入漁陽、雁門, 敗都尉, 殺略三千餘人. 遣將軍衛靑出雁門, 將軍李息出代, 獲首虜數千級. 東夷薉君南閭等[一]口二十八萬人降, 爲蒼海郡.
[一]服虔曰:「穢貊在辰韓之北, 高句麗沃沮之南, 東窮于大海.」 晉灼曰:「薉, 古穢字.」 師古曰:「南閭者, 薉君之名.」
(원삭元朔 원년인 B.C 128) 가을, 흉노가 요서를 침입해 태수를 죽였다. 어양, 안문을 침입해 도위를 패배시키고 3천여 명을 살략했다. 장군 위청(衛靑)을 보내 안문을 나가게 하고, 장군 이식(李息)은 대(代)를 나가게 하여 수천 급을 참획했다. ; 동이(東夷) 예군(薉君) 남려(南閭) 등 구(口) 28만 명이 항복하자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했다.
[一] 복건 왈 [예맥(穢貊)은 진한(辰韓)의 북쪽, 고구려, 옥저의 남쪽에 있었고 동쪽으로 대해로 막혀있었다. 진작 왈, 薉는 옛날의 穢 자다. 안사고 왈, 남려(南閭)는 예군(薉君)의 이름이다.]
권30 평준서 平準書
自是之後,嚴助﹑朱買臣等招來東甌,[一]事兩越,[二]江淮之閒蕭然煩費矣.唐蒙﹑司馬相如開路西南夷,鑿山通道千餘里,以廣巴蜀,巴蜀之民罷焉.彭吳[三]賈滅朝鮮,[四]置滄海之郡,則燕齊之閒靡然發動.及王恢設謀馬邑,匈奴絶和親,侵擾北邊,兵連而不解,天下苦其勞,而干戈日滋.
[一]正義烏侯反.今台州永寧是也.
[二]正義南越及閩越.南越,今廣州南海也.閩越,今建州建安也.
[三]索隱人姓名.
[四]索隱彭吳始開其道而滅之也.
이 이후로(한무제 즉위 이래 재정과 경제가 풍족해지고 사치풍조가 일어난 후) 엄조(嚴助), 주매신(朱買臣) 등이 동구(東甌,※)를 [1] 초래(招來,초무;끌어들임)하고 양월(兩越,남월과 동월)에서 일을 벌이니 [2] 강회(江淮,장강과 회수) 사이가 소란해지고 크게 비용이 소모되었다. 당몽(唐蒙),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서남이(西南夷)에 이르는 도로를 열어 천여 리에 걸쳐 산을 뚫고 길을 통하게 하니 파촉(巴蜀) 땅을 개척했으나 파촉 백성들은 피폐해졌다. 팽오(彭吳)는 [3] 조선(朝鮮)을 멸하고자 하여 [4]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니 연(燕), 제(齊) 사이가 바람에 휩쓸리듯 소란해졌다. 그러다 왕회(王恢)가 마읍(馬邑)에서의 모책을 꾸미자 흉노가 화친을 끊고 북변을 침요(侵擾)하여 전쟁이 연이어 풀리지 않으니, 천하가 그 노역에 괴로움을 당했으나 간과(干戈,전란)는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창해군(蒼海郡) 폐지
한(漢) 무제(武帝)는 팽오(彭吳) 등에게 요동군(遼東郡)에서 창해군(蒼海郡)에 이르는 교통로를 닦게 하였지만 인력과 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소모되어 공손홍(公孫弘, BC 200 ~ BC 121) 등의 건의를 받아 교통로 개척을 중단하였다. 그리고 BC 126년에 창해군(蒼海郡)도 폐지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창해군 [滄(蒼)海郡] (두산백과)
한나라는 마침내 하남 지역을 탈취하여 그곳에 삭방성(朔方城)을 쌓고
옛날 진(秦)나라 때 몽염(蒙恬)이 만들었던 요새를 다시 수리하고 황하를 따라 견고하게 방어선을 쳤다.
한나라가 상곡군의 구불구불하고 외진 조양(造陽) 일대의 땅을 포기하여 흉노에게 넘겨주었다.
이 해가 한 무제(漢 武帝) 원삭(元朔) 2년(기원전 127년)이었다.
[출처] 110-9/15[史記列傳(사기열전)] 권110.匈奴列傳(흉노열전) (9/15)
※주) 황하를 따라 방어선을 쳤다는 것은 섬서성 북쪽을 방어한 것이고, 상곡군의 구불구불하고 외진 조양일대의 땅을 포기한 것은 임분시와 운성시를 제외한 산서성 전부를 포기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