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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나라 장군 진개 (연장성을 상곡인 양천시에서 호타하 물길을 따라 형수시 북쪽 요동까지 쌓았다)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에 나타난 (전국시대) 연장성燕長城
※주) 태행팔경太行八陘 : 태행팔형(太行八陘)중의 포음형(浦陰陘)의 역사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주) 『한서지리지 요서군』에 '令支, 有孤竹城'
요서군 영지현에 고죽성孤竹城이 있다고 했으니 석가장시는 고죽국孤竹國이 있던 장소다
연燕나라 상곡上曲은 양천시, 요서遙西는 석가장시, 요동遙東은 형수시 북쪽이다
따라서 연나라는 진중시晉中市 수양현壽陽縣에서 석가장시石家莊市를 거쳐서, 형수시衡水市 안평현安平县까지 호타하滹沱河 물길을 따라 연장성燕長城을 쌓았다
>>> ■ 연燕나라가 전국칠웅인 것은 마지막까지 살아 남았기 때문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 남은 자를 강한 자라고 후세는 이야기 한다
1) 『사기 연소공세가』에 따르면
연나라는 제나라와 진나라에 끼어 있어 가장 약소한 국가로서 몇번이나 망할뻔 했다고 했다
2) 『사기 악의열전』에 따르면 연나라가 가장 강성할 시기인 연 소왕 때(기원전 284년)..
약소국인 연나라는 조나라, 초나라, 한나라, 위나라와 연합군을 만들어서 원수인 제나라를 정벌했다
3) 제나라를 정벌한 소공때 연나라가 가장 강성할 시기는
고조선의 지리를 잘 아는 진개가 고조선을 기습 공격하여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 군을 설치하여
연나라가 강성하게 된 이후에 연소왕이 연합군을 만들어서 제나라를 정벌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겨우 나라를 유지하고 있던 가장 약소한 국가인 연나라가.. 고조선을 물리 치고 지금의 북한 평양까지 수천리 땅을 확보했다고 믿는 것은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인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태사공은 말한다. ※ 주) 태사공(太史公) : 사마천(司馬遷)의 자칭(自稱)
“소공(召公) 석(奭)은 어질다 하겠다! 팥배나무도 백성들이 사모하거늘 사람이야 오죽하겠는가?
연나라는 밖으로는 만맥(蠻貉)과 가깝고 안으로는 제나라와 진(晉)나라와 끼어 있어,
험하고 강한 나라 사이에서 가장 약소한 나라로서 거의 몇 번이나 망할 뻔했다.
그럼에도 사직의 제사를 800에서 900년을 유지하며 희씨 성들 가운데 가장 늦게 망했으니
이 어찌 소공의 공적이 아니겠는가!”
[출처] 34-06[史記(사기) 세가(世家)] 권34.燕召公世家(연소공세가:연세가) (06/06)<연나라의 멸망>
연소왕燕昭王이 악의를 보내서 조 혜문왕(趙 惠文王)과 맹약을 맺고, 초나라와 위나라에는 따로 사자를 보내서 연합했으며,조나라를 통해 진나라에 제나라를 치는 것이 유리하다는 점을 설득하게 했다.
제후들도 제 민왕의 교만함과 포악함을 꺼렸으므로 모두 앞 다투어 연나라와 합종하여 제나라를 치기로 했다. 악의가 돌아와서 보고하자 연소왕은 전군을 일으키고 악의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삼았으며, 조 혜문왕은 상국의 인수를 악의에게 주었다. 악의는 조나라, 초나라, 한나라, 위나라, 연나라의 병사를 아울러 통솔하여 제나라를 쳤으며, 제수(濟水) 서쪽에서 제나라를 격파했다. 제후들의 병사는 전투를 마치고 돌아갔으나 악의와 연나라 군대만은 제나라를 추격하여 제나라의 도성 임치(臨淄)에 이르렀다.
제 민왕은 제수 서쪽에서 패하고 도망쳐 달아나서 거(莒) 땅을 지켰다. 악의의 군대는 홀로 머물며 제나라를 순행했으나, 제나라는 모두 성을 지키기만 하였다. 악의가 임치 땅을 공격해 들어가서 제나라의 보물과 재물, 제기를 모두 빼앗아 연나라로 보냈다.
[출처] 80-1/4[史記列傳(사기열전)] 권80 악의열전(樂毅列傳) (1/4)
>>> ■ 연燕장성은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
연燕나라가 고조선을 습격하여 땅을 빼았고,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 등에 군을 설치했고, 그 자리에 연 燕장성을 쌓았다
연나라의 명장 진개(秦開)가 흉노에 인질로 가 있으면서 그들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연나라로 돌아온 후 군대를 이끌고 동호를 습격해 패주시켰으며, 이때 동호는 1천여 리나 물러갔다.
형가(荊軻)와 함께 진왕 영정을 암살하려던 진무양(秦舞陽)은 진개의 손자다.
연나라 역시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에 이르는 지역에 장성을 쌓았다.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 등에 군을 설치하여 북방 융적을 방어했다.
[출처] 110-2/15[史記列傳(사기열전)] 권110.匈奴列傳(흉노열전) (2/15)
※주) 동호는 고조선이다
⊙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 은 연燕 진개(秦開)가 설치한 군으로
상곡군에 조양이 있고, 요동군에 양평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 연나라 진개가 고조선으로 부터 빼앗은 고조선 땅의 위치는?
1) 진시황의 진나라가 어양을 지키기 위해 대택향에 군사를 주둔시켰으니
어양은 대택향(대륙택 근처 추정) 부근인 석가장시 남쪽의 고읍현高邑縣으로 추정된다
2) 한나라 시대에 태행산맥 동쪽에 어양(漁陽)과 우북평(右北平)과 요서(遼西)와 요동(遼東)이 있고
태행산맥 서쪽에 상곡(上谷)과 대군(代郡)과 안문(雁門)이 있다
3) 요서는 어양의 북쪽, 우북평군은 어양의 동쪽, 요동은 우북평군의 동쪽으로 추정되며
요동, 요서, 우북평, 어양이 석가장시 남쪽으로 모두가 호타하滹沱河 남쪽이다
집해정현이 말하길: ‘지리지에는 항수가 항산에서 나온다. 위수는 영수(현)에 있고, 대륙택은 거록(현)에 있다.’ (사기)색은은 ‘이 문장에서 항산, 항수를 모두 「상」으로 바꾸었는데, 한나라 문제의 휘호를 피하기 위한 까닭이다. 상수는 곡양현의 상산위에서 나오는데 동쪽으로 흘러 구수로 들어간다. 위수는 상산 영수현 동에서 나와서 호지(지금의 호타하가 관련)로 들어간다,’고 한다. 곽박이 「대륙(택)은, 지금의 거록(현) 북쪽의 광하택이 이곳이다」고 역시 말했다
[출처] 사기 하본기 우임금 치수지역(황하 북쪽)
--> 대륙택大陸澤은 하북성 河北省 형태시邢台市 신하현新河县 서쪽, 거록현巨鹿縣 북쪽이다
※주) 『한서지리지 거록군』 '大陸在巨鹿縣北也' 대륙택이 거록현 북쪽에 있다
한漢나라 2세 원년(기원전 209년) 7월, 빈민가 백성들을 징발하여 수자리를 보내 어양(漁陽)을 지키게 하여 900명이 대택향(大澤鄕)에 주둔하게 되었다.
[출처] 48-01/06[史記(사기)세가(世家)] 권48.陳涉世家(진섭세가)(01/06)<진승(陳勝)·오광(吳廣)의 난>
--> 대택향大澤鄕은 대륙택大陸澤 북쪽 또는 서쪽으로 어양을 지키기 위해 대륙향에 군사를 보냈으니 어양漁陽은 형태시 북쪽과 석가장시 남쪽 사이인 고읍현高邑縣으로 추정된다
연(燕)나라 땅은,
동쪽에는 어양(漁陽)과 우북평(右北平)과 요서(遼西)와 요동(遼東)이 있고,
서쪽에는 상곡(上谷)과 대군(代郡)과 안문(雁門)이 있다
[출처] 한지 韓地(한서지리지下) - 연(燕)나라 지역
※주) 여기서 말하는 연나라 땅은 한漢 시대 기원전 10년의 연燕나라 땅이다
--> 한나라 시대의 연나라 동쪽은 태행산맥 동쪽으로 어양(漁陽)과 우북평(右北平)과 요서(遼西)와 요동(遼東)이 있고 서쪽은 태행산맥 서쪽으로 상곡(上谷)과 대군(代郡)과 안문(雁門)이 있다
다음해(기원전 135년) 흉노가 대거 변경을 침입하여 요서태수(遼西太守)를 죽이고,
바로 안문(雁門)으로 침입하여 수천 명의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했다.
이에 거기장군 위청은 그들을 추격하고자 안문에서 출정했다.
위위(衛尉) 한안국은 재관장군(材官將軍)이 되어 어양(漁陽)에서 주둔하여 지켰다.
이곳에서 한안국은 포로를 생포했는데 포로가 흉노는 이미 멀리 떠났다고 말했다.
이에 한안국은 즉시 황제에게 상서하여 때마침 농사철이니 잠시 군대의 주둔을 중지해 줄 것을 청했다.
병사들을 주둔시키지 않은 지 한 달여 만에 흉노가 대거 상곡과 어양 일대를 침입했다.
이 때 한안국의 군영에는 겨우 7백여 명의 병사만 남아있는데, 출병하여 흉노와 교전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다시 군영으로 퇴각했다.
이에 흉노는 1천여 명의 백성과 가축, 재물 등을 약탈해 갔다.
황제는 이 소식을 듣고 격노하여 사자를 보내 한안국을 책망했다.
그리고 한안국을 더욱 동쪽으로 옮겨 우북평(右北平)에 주둔하게 하였다.(기원전 128년)
[출처] 108-4/4[史記列傳(사기열전)] 권108.韓長孺列傳(한장유열전)
※주) 안문은 산동성 서북부 흔주시 북쪽이고, 요서는 태행산 동쪽이기에...
"흉노가 대거 변경인 안문(雁門)으로 침입하여 요서태수(遼西太守)를 죽이고, 수천 명의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했다" 가 맞는 것 같다
※주) 요서에는 새塞(변방, 장성)가 있으나, 어양(어양에는 새塞가 없음)에 군사를 주둔 시켰으니, 요서는 어양의 북쪽이고, 우북평군은 어양의 동쪽에 있다(한서지리지에 따르면 요서는 고죽국이 있던 자리다)
>>> ■ 연燕장성 서쪽 끝인 조양造陽 위치
조양造陽은 연燕 나라 상곡上谷 땅으로 산서성山西省 진중시晉中市 수양현壽陽縣이다
한 무제(漢 武帝) 원삭(元朔) 2년(기원전 127년)
마읍 사건이 있은 지 5년이 지난 그해 가을,
한나라는 장군 네 명에게 각각 일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관문 교역장 근처의 흉노를 공격하도록 했다.
장군 위청(衛靑)은 상곡군에서 출격해 용성(龍城)까지 진격하여 흉노의 7백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공손하(公孫賀)는 운중군에서 출격했으나 아무런 전과가 없었다.
공손오(公孫敖)는 대군(代郡)에서 출격했는데 흉노에게 패해서 7천여 명의 군사를 잃었다.
이광(李廣)은 안문에서 출격했다가 흉노에게 패하여 생포되었다가 나중에 도망쳐 돌아왔다.
한나라는 공손오와 이광을 수감하였는데 그들은 속죄금을 내고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그해 겨울, 흉노는 자주 변경으로 쳐들어와 약탈을 했는데 그중 어양군(漁陽郡)의 피해가 가장 심했다.
한나라는 장군 한안국(韓安國)을 어양에 주둔시켜 흉노의 침입에 대비했다.
그 이듬해 가을, 흉노의 기병 2만 명이 한나라에 침입해서 요서 태수(太守)를 죽이고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또한 흉노는 어양을 공격해 어양 태수의 군사 1천여 명을 패배시키고
한나라 장군 한안국을 포위했는데 한안국의 군사는 그때 1천여 명밖에 되지 않았고, 게다가 전멸 당할 직전이었는데 때마침 연왕(燕王)의 구원병이 도착하여 흉노가 물러갔다.
흉노는 또 안문군(鴈門郡)에 침입해 1천여 명의 백성들을 죽이거나 잡아갔다.
이에 한나라는 장군 위청(衛青)에게 3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안문에서 출격하게 하고
이식(李息)에게는 대군(代郡)에서 출격해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
그 결과 한나라 군대는 수천 명을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그 다음해 위청은 또 운중에서 출격해 서쪽으로 나아가 농서(隴西)까지 진격하여
황하 하투(河套) 이남 땅에 주둔한 흉노의 누번왕(樓煩王)과 백양왕(白羊王)을 공격하여,
흉노 수천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고 소와 양 1백여 만 마리를 얻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하여 한나라는 마침내 하남 지역을 탈취하여 그곳에 삭방성(朔方城)을 쌓고
옛날 진(秦)나라 때 몽염(蒙恬)이 만들었던 요새를 다시 수리하고 황하를 따라 견고하게 방어선을 쳤다.
한나라 역시 상곡군의 구불구불하고 외진 조양(造陽) 일대의 땅을 포기하여 흉노에게 넘겨주었다.
[출처] 110-9/15[史記列傳(사기열전)] 권110.匈奴列傳(흉노열전) (9/15)
⊙ 한나라 군대가 출발한 곳은 대군(진중시 남부), 안문(흔주시), 운중(태원시) 상곡군(진중시)이니 산서성 서북부고 흉노에게 모두 탈취한 하남 지역이란 섬서성 북부인 하서지역이다
⊙ 따라서 진중시晋中市 주변이 한漢나라 상곡군으로 추정된다
■ 1) 연燕나라 상곡上谷은 태행산맥 서쪽이고 태행산맥 동쪽의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과 태행 팔경으로 통과할 수 있다 진중시와 가까운 정경井經이 양천시에 동쪽이니 연나라 상곡은 양천시로 추정된다
2) 진중시晉中市 중심으로 흉노 토벌이 시작되었고, 진중晋中은 옛날에 조趙나라 땅이었다
따라서 연나라 상곡上谷은 산서성山西省 양천시陽泉市이고, 연나라 상곡군인 조양은 양천시보다 서쪽이니,
조양造陽을 양천시와 진중시와 중간의 산서성山西省 진중시晉中市 수양현壽陽縣으로 비정한다
>>> ■ 연燕장성 동쪽 끝인 양평襄平 위치
양평襄平이 이름이 바뀌어 무수(武隧,武隧)가 되었고, 형수이시衡水市 우창현武強縣 북서 방향의 안평현安平縣이다
“수성현은 옛날의 무수현이다.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遂城古武遂也. 秦築長城之所起).”
[출처] 『통전』권178, 주군8, 고기주 상, 역주易州
樂浪郡 漢置。統縣六,戶三千七百 :
조선 朝鮮-周封箕子地, 둔유屯有, 혼미渾彌, 수성遂城-秦築長城之所起, 누방鏤方, 사망駟望
遂城- 秦築長城之所起。낙랑군 수성현 : 진장성[만리장성]의 축성이 시작된 곳이다.
[출처] 『진서晉書 지리지 평주 낙랑군 』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長城起於此山。--생략 --
갈석산은 한 낙랑군 수성현에 있으며,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된다. ---생략 --
[출처] 『통전 변방전 동이 고구려조 』
廣信軍治遂城縣 戰國時武遂縣地 秦築長城所起因名遂城 本朝建軍 東至安肅軍 二十里西至長城 광신군 치소는 수성현이다. 전국시기 무수(武遂)현의 땅이다. 진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라 하여 수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본조(송나라)가 군을 세웠다. 동쪽에는 안숙(安肅)군이 있고, 군에서 20리 서쪽에 장성이 있다.
[출처 『무경총요武經總要』前集 권16 上
(안숙)현의 서북 25리에 장성(長城)이 있다. 예로부터 전하기를 진시황이 장군 몽염(蒙恬)을 무수(武遂)로 보내 장성을 쌓았다고 한다. 長城在縣西北二十五里 舊傳秦始皇遣將蒙恬於武遂築長城
[출처『安肅縣志』 (乾隆 43, 1778) 권2
--> 춘추전국 시대 연燕나라 요동군의 양평襄平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문헌을 찾을 수 없었지만...낙랑군 수성현에서 장성이 시작되었고, 수성현의 옛날 지명이 무수武遂다.
연왕燕王 희 12년(기원전 243년), 조趙나라가 이목(李牧)에게 연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무수(武遂)와 방성(方城)을 빼앗았다.
[출처] 34-06[史記(사기) 세가(世家)] 권34.燕召公世家(연소공세가:연세가) (06/06)<연나라의 멸망>
--> 무수武遂는 전국시대 연燕지명으로 무수에서 장성이 시작되었다고 했으니 전국시대에 양평襄平에서 무수武遂로 지명이 바뀐 것으로 본다 양평襄平이 무수武遂이니, 연燕 장성의 동쪽 끝인 무수武遂의 위치를 확인하면 된다
河間國(하간국) 縣四(현사) 4개의 현(縣)이 있다.
武隧(무수) 莽曰桓隧(망왈환수) 무수현(武隧縣)은, 왕망(王莽) 때는 환수(桓隧)라고 불렀다.
[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수(隧)의 음(音)은 수(遂)이다"라고 했다
[출처] 하간국 河間國(한서지리지下)
『당나라 두우의 통전』 지명
○신도군, 기주 信都郡 冀州지저우 领县九:信都 남궁南宫 당양堂阳 무강武强(우창 漢무수武隧縣) 下博 枣强 형수衡水(헝수이) 阜城 武邑
[출처] 낙랑군 조선현 한현도 지리추적-2
하간국(河間國) : 전한시대 하간국 총 4현이다. 서울은 악성현이다
무수현武隧縣 :형수이시衡水市 우창현武強縣 북서
[출처]하간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 연燕장성 동쪽 시작점인 양평襄平은 무수(武隧,武隧)로 이름이 바뀌었고,형수이시衡水市 우창현武強縣 북서 방향의 안평현安平縣으로 비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