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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칼럼

[정상규의 히든 히어로] 투쟁 나선 노인들…선봉에 선 ‘늦깎이 독립투사’

잊혀진 한의사 독립투사들 ②김치보(金致寶:1859.9.17~1941.11.18)1919년 3월 26일 러시아 연해주에서 결성된 '노인동맹단' 명부에 적힌 김치보의 이름. 김치보는 이날 발회식에서 만장일치로 단장에 선출됐다.

김치보는 1859년 9월 17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50세가 되던 1908년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는데, 이때 ‘금광 감리를 거친 사람’이라는 뜻인 ‘김감리(監理)’라고 불렸다는 점에서 이주 전 금광업에 종사했던 것 같다.

1860년대 함경북도 사람들이 최초로 이주해 정착한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한인들이 옹기종기 마을도 만들고 교회도 짓고 살았다. 새로운 한인 마을이라는 이름에서 따와 그곳을 신한촌이라 불렀다. 김치보는 신한촌에서 ‘덕창국’이라는 한약방을 개업하여 운영했는데 상하이로부터 직접 약재를 수입하여 블라디보스토크 지역 한인들에게 판매했고, 비공식적으로 의병들을 치료했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인해 일제로부터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되던 때, 서간도 삼원보에서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 이장녕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할 터를 알아보고 있었다. 헤이그 특사 3인방인 이상설, 이위종, 이준 열사는 피고가 없는 상태에서 재판이 이루어지는 궐석재판 결과 무기징역과 사형을 선고받았다. 조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던 이들이 향한 곳은 함경북도 한인들이 세운 마을, 바로 신한촌이었다.

러시아 연해주 신한촌 전경.
헤이그 특사를 포함해 이위종의 아버지 이범진 대한제국 공사의 사촌이자 간도관리사였던 이범윤, 연해주 지역에서 군수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최재형 등 민족의 선각자들이 모두 신한촌에 모였고 이때 김치보 역시 이들과 함께 있었다.

상대적으로 지역 원로 격에 속했던 김치보는 평소 덕망이 좋아 많은 한인 청년들이 따랐던 것 같다. 1909년 4월 김치보는 청년돈의회(靑年敦義會)를 조직하여 회장을 맡았다. 청년돈의회는 명목상 청년들의 교육을 발달시키기 위하여 조직되었다고 하여 매주 일요일 저녁 7시에 토론회를 개최하였는데, 청년돈의회가 언제 해산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연해주 지역에서 발행된 ‘권업신문’ 1913년 11월 9일 자에 청년돈의회 명의의 광고가 실린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는 계속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분투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곧 망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연해주 한인사회 일대에 퍼졌다. 연해주의 한인들은 망국의 현실이 눈앞에 다가온 상황에서 강제합병의 무효를 선언하고 병탄 반대 투쟁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단체를 조직했다. 이들은 각국 정부 앞으로 탄원서를 보내기로 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애국동맹단과 연락을 취해 공동으로 반대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결국 이들 150여명의 한인들이 모여 성명회(聲明會)를 결성하였다. 성명회의 명칭은 ‘저들의 죄를 성토하고 우리의 원통함을 밝힌다’(聲彼之罪明我之寃)에서 따왔다.

성명회 선언서.(1910년 8월)
결국, 1910년 8월 23일 오후 4시 국권침탈 소식이 러시아 한인 마을에 전해졌다. 한인 200여명이 즉시 신한촌(당시 지명: 개척리) 한민학교에 모였다. 비통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는 진행되었다. 회의장 안은 금세 700여명의 한인들로 가득 찼고 이들은 병탄 반대와 무효를 선언하는 취지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각국 정부에 병탄조약의 원천 무효를 주장하는 선언서를 발송했다.

성명회 선언서는 헤이그특사 이상설이 원고를 작성했고, 일찍부터 항일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유인석이 이를 보완하여 최종 완성했다. 선언서에서는 한인의 결연한 독립 의지를 표명한 뒤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열강의 지지를 호소하였고 개항 이래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에 대해 논리적으로 서술했다. 선언서에는 을사늑약 이후 연해주로 망명한 유인석, 이범윤, 이상설, 홍범도, 안정근, 최재형 등 연해주 한인사회의 지도자들이 포함된 총 8642명의 서명이 첨부되었다. 당시 과학 문명 등 시대적 제약과 국외 지역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이 숫자는 가히 충격적일 만큼 감동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가 러시아에 강력히 항의를 제기하여 성명회 주요 인사들이 체포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자연스레 해산되었다. 그러나 성명회는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성명회에 참가했던 인사들의 독립투쟁 의지는 전혀 꺾이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거세졌다. 다음 해에 만들어진 한인회 자치기구 권업회(勸業會) 창립에 ‘성명회 선언서’에 서명했던 인사들 대부분의 이름이 발견됐다.

일본 헌병대에 의해 무자비하게 학살된 신한촌 한인과 독립운동가들.
권업회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연해주 한인들의 실업을 권장하고 노동을 소개하며 교육을 보급하기 위한 기관으로 설립되었다. 이에 따라 권업회는 권업신문의 간행, 교육진흥활동, 한인의 자치활동, 토지조차와 귀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이 단체가 명칭을 권업회라고 한 것은 일본의 감시 및 방해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고, 사실상 권업회는 연해주 한인들의 항일투쟁을 조직하는 독립운동단체였다.

권업회 기관지 '권업신문'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연해주에도 전해왔다. 3월 17일 대한국민의회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연해주 일대에서 대규모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26일 김치보의 한약방 덕창국에서 러시아 한인 원로들이 모여 노인동맹단이 조직되었다. 이날 거행된 발회식에서 김치보는 만장일치로 단장에 선출됐다. 그가 덕창국을 운영하며 성명회-권업회에서 계속 활동하고, 독립의병들을 물심양면으로 치료하고 지원해줬기 때문이었다. 노인동맹단은 46세 이상의 나이 제한을 두었을 뿐 남녀를 가리지 않고 회원자격을 부여했다.

2500명의 명단이 적힌 대한국민 노인동맹단 명부.
1919년 5월 31일 오전 11시 종로 보신각 앞에 노인동맹단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준비한 연설문을 꺼내어 민중들 앞에서 목청껏 연설을 시작했고 곧이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보신각 앞을 가득 채운 민중들은 너도나도 만세를 외치며 마치 제2의 3·1만세 운동이 일어난 것처럼 열기가 거세져 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깜짝 놀란 일본 경찰과 헌병대는 즉시 주모자들을 체포했다. 그 후 김치보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연해주 지역 연통제인 아령총판부를 최재형과 함께 이끌었고,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이후 김치보의 생애와 죽음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김치보는 연해주로 이주한 이후 연해주에서 전개된 거의 모든 항일투쟁에 참여했다. 유인석 의병장을 도와 의병 자금의 모집부터 성명회를 거쳐 권업회 활동을 하였고, 해외에서 조직된 최초의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에도 참가했으며, 1919년 3월 17일 연해주 만세시위 운동과 3·1운동 1주년 기념식도 주도했다. 3·1운동 이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노인동맹단을 조직하여 강우규 의사의 의거를 지원했던 인물이 바로 김치보다. 비록 늦은 나이인 50세가 되어서야 독립운동의 길에 나섰지만, 이후 김치보가 걸어온 길은 러시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수많은 애국지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정상규 작가는 다양한 역사 콘텐츠를 통해 숨겨진 위인을 발굴해왔다. 현재 ‘국가유공자 지원 시민단체 포윅스’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독립운동 맞습니다’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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