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칼럼
‘실증사학’은 없다
우리는 역사학의 한 갈래로 ‘실증사학’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학계에서 역사학파를 실증사학, 민족주의사학, 사회경제사학으로 나누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증사학이라는 용어는 일제가 우리 역사를 왜곡하면서 ‘현대 과학적 방법론’인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서구의 실증주의적 학문 방법론을 강조하며 만든 위장용어다.
실증주의는 19세기 서구에서 ‘자연과학에서 사용되는 실증적 연구방법을 인간과 사회현상에 대한 탐구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실증사학에만 적용되는 원리가 아니라 모든 학문, 모든 역사학 분파에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학문 방법론이다. 한국문화대백과사전에는 실증사학에 대해 ‘역사 연구에 있어서 실증적인 방법을 중시하는 역사학’이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실증사학은 19세기 말부터, 특히 일제시대부터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1930년대부터는 한국인 학자들이 등장해서 실증사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이병도(李丙燾)·김상기(金庠基)·이상백(李相佰)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의 연구 활동은 해방 뒤 1950년대까지 이어졌으며, 1960년대 이후 새로운 세대 학자들의 연구에도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 실증사학의 특징은 연구방법에 있어서 실제적인 증거를 가지고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며, 가장 중시한 증거는 정확한 문헌 자료였다. 정확한 사료를 확보하기 위해 합리성 여부를 기준으로 사료를 비판하고, 그 사료를 증거로 역사적 사실을 해명했다.”
결국 ‘일제가 조작한 식민사학과 그것을 그대로 이은 현 우리나라 사학계의 주장이 실증사학’이라는 설명이 된다.
이와는 달리 ‘민족주의사학’은 한국사를 왜곡하는 일제의 식민사관에 맞서 한민족의 주체적인 역사상을 수립하고자 했던 광복투쟁의 한 방법으로서 민족적인 측면이 강조되었다. 당시의 대표적 학자들인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 등은 특히 역사의 원동력인 민족의 혼과 얼을 강조했다.
또 ‘사회경제사학’은 유물사관에 바탕을 두고 세계사의 보편적인 법칙에 따른 사회변혁의 필연성을 강조하면서 식민사관의 정체성론을 비판했다. 1930년대 백남운을 시작으로 그 후 김석형, 박시형 등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남북의 이념 갈등으로 남한에서는 자취를 감추고 북한에서만 연구되고 있다.
이런 방식의 학파 분류에서는 민족주의사학과 사회경제사학이 민족과 사회주의적인 법칙이라는 중점 내용을 잣대로 삼았다. 그러나 실증사학은 모든 학문이나 학파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실증’이라는 연구방법으로 분류한 것으로, 일본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이런 이름의 역사학파가 없다.
특히 식민사학에서는 한사군의 낙랑군이 평양 부근에 있었다고 역사를 왜곡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강조한 역사기록이 없으니 다른 데서 나온 유물을 몰래 대동강변의 땅속에 묻어놓고 거기서 발굴된 것처럼 거짓 쇼까지 하면서 ‘실증’이라고 위장했다. 결국 실증사학이라는 말은 일제가 우리 역사를 왜곡하면서 없는 역사기록을 감추기 위해 ‘실증주의’라는 현대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하여 만들어낸 용어로서, 사실상의 식민주의사학인 것이다. 지금 우리 역사학계에서도 이와 똑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윤내현, 김종서, 이덕일, 심백강, 박정학 등 민족주의사학의 맥을 이은 박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민족사 복원 운동 단체에서는 이들이 1차 사료를 바탕으로 한 실증적 학문방법에 따라 연구를 하기 때문에 ‘민족주의사학’ 대신 ‘바른 역사학’이라고 부른다. 이들을 중심으로 한 바른 역사 복원 운동 단체에서는 ‘사료를 중시한다고 강조하는 실증사학자’들에게 한사군의 위치 등에 대한 공개토론을 제의했다. 그러나 ‘사료가 없으니’ 토론에는 나오지 않으면서도 교과서에서 ‘민족’이라는 단어나 우리 ‘민족의 이름’, ‘형성 시기’ 등을 빼어버리는 등 민족 문제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민족주의사학에 대한 열등감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광복 75주년이 되는 올해부터는 모든 국민들이 일제와 그 추종세력들이 만들어 사용하면서 실제로는 실증을 중시하지 않는 ‘실증사학’이라는 거짓용어에 현혹되지 않기를 바란다.
박정학 역사학 박사·사단법인 한배달 이사장
출처 : 울산제일일보(http://www.ujeil.com)
실증주의는 19세기 서구에서 ‘자연과학에서 사용되는 실증적 연구방법을 인간과 사회현상에 대한 탐구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실증사학에만 적용되는 원리가 아니라 모든 학문, 모든 역사학 분파에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학문 방법론이다. 한국문화대백과사전에는 실증사학에 대해 ‘역사 연구에 있어서 실증적인 방법을 중시하는 역사학’이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실증사학은 19세기 말부터, 특히 일제시대부터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1930년대부터는 한국인 학자들이 등장해서 실증사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이병도(李丙燾)·김상기(金庠基)·이상백(李相佰)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의 연구 활동은 해방 뒤 1950년대까지 이어졌으며, 1960년대 이후 새로운 세대 학자들의 연구에도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 실증사학의 특징은 연구방법에 있어서 실제적인 증거를 가지고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며, 가장 중시한 증거는 정확한 문헌 자료였다. 정확한 사료를 확보하기 위해 합리성 여부를 기준으로 사료를 비판하고, 그 사료를 증거로 역사적 사실을 해명했다.”
결국 ‘일제가 조작한 식민사학과 그것을 그대로 이은 현 우리나라 사학계의 주장이 실증사학’이라는 설명이 된다.
이와는 달리 ‘민족주의사학’은 한국사를 왜곡하는 일제의 식민사관에 맞서 한민족의 주체적인 역사상을 수립하고자 했던 광복투쟁의 한 방법으로서 민족적인 측면이 강조되었다. 당시의 대표적 학자들인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 등은 특히 역사의 원동력인 민족의 혼과 얼을 강조했다.
또 ‘사회경제사학’은 유물사관에 바탕을 두고 세계사의 보편적인 법칙에 따른 사회변혁의 필연성을 강조하면서 식민사관의 정체성론을 비판했다. 1930년대 백남운을 시작으로 그 후 김석형, 박시형 등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남북의 이념 갈등으로 남한에서는 자취를 감추고 북한에서만 연구되고 있다.
이런 방식의 학파 분류에서는 민족주의사학과 사회경제사학이 민족과 사회주의적인 법칙이라는 중점 내용을 잣대로 삼았다. 그러나 실증사학은 모든 학문이나 학파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실증’이라는 연구방법으로 분류한 것으로, 일본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이런 이름의 역사학파가 없다.
특히 식민사학에서는 한사군의 낙랑군이 평양 부근에 있었다고 역사를 왜곡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강조한 역사기록이 없으니 다른 데서 나온 유물을 몰래 대동강변의 땅속에 묻어놓고 거기서 발굴된 것처럼 거짓 쇼까지 하면서 ‘실증’이라고 위장했다. 결국 실증사학이라는 말은 일제가 우리 역사를 왜곡하면서 없는 역사기록을 감추기 위해 ‘실증주의’라는 현대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하여 만들어낸 용어로서, 사실상의 식민주의사학인 것이다. 지금 우리 역사학계에서도 이와 똑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윤내현, 김종서, 이덕일, 심백강, 박정학 등 민족주의사학의 맥을 이은 박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민족사 복원 운동 단체에서는 이들이 1차 사료를 바탕으로 한 실증적 학문방법에 따라 연구를 하기 때문에 ‘민족주의사학’ 대신 ‘바른 역사학’이라고 부른다. 이들을 중심으로 한 바른 역사 복원 운동 단체에서는 ‘사료를 중시한다고 강조하는 실증사학자’들에게 한사군의 위치 등에 대한 공개토론을 제의했다. 그러나 ‘사료가 없으니’ 토론에는 나오지 않으면서도 교과서에서 ‘민족’이라는 단어나 우리 ‘민족의 이름’, ‘형성 시기’ 등을 빼어버리는 등 민족 문제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민족주의사학에 대한 열등감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광복 75주년이 되는 올해부터는 모든 국민들이 일제와 그 추종세력들이 만들어 사용하면서 실제로는 실증을 중시하지 않는 ‘실증사학’이라는 거짓용어에 현혹되지 않기를 바란다.
박정학 역사학 박사·사단법인 한배달 이사장
출처 : 울산제일일보(http://www.ujeil.com)